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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과 분열

 

러시아 맑스주의1: 기원(2)

 

 

이재유┃서울

 

 

 

지난 연재에서는 19세기 중반 정치‧경제적으로 낙후된 러시아에서 농촌공동체를 배경으로 전제군주제와 봉건제에 맞선 지식인 중심 혁명운동(‘인민주의’)이 발화했음을 살폈다. 또한,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1880년대 무렵부터 맑스주의가 러시아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후 사회주의 혁명의 씨앗이 이때부터 뿌리내린 것이다.

 

맑스주의가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던 초기인 18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사상은 러시아인 사이에서 폭넓게 확산하진 못했다. 하지만 1891년 심각한 기근이 발생해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는 가운데 차르(러시아어로 ‘군주’를 뜻함)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만 보이자(심지어 국내에서 인민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도 곡물 수출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중의 분노가 치솟으며 러시아 맑스주의 조직들 역시 활기를 띠게 됐다.

 

 

 

‘경제주의’ 대두

 

혁명운동에 가담한 러시아 국내 인텔리겐챠(지식인) 단체들은 이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이 격화하고 성공을 거두자 ‘노동자/지식인’이라는 구분을 버리고 노동자 대열에 동참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중운동과 혁명이론의 결합’이 아닌 잘못된 편향, 즉 (주로 지식인이 담당하고 있던) 이론적‧정치적 전략 연구를 등한시한 채 혁명운동을 경제투쟁(임금‧노동조건 등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과 단기 목표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대두했다. 이러한 상황은 혁명운동에서 이론적‧정치적 전략의 약화와 부재를 야기했는데, 이에 대해 악셀로드*는 1897년에 경제주의에 대한 총체적 비판을 가한 바 있다.

 

P.B. Axelrod, 1850~1928. 지난 연재에서 소개한 플레하노프와 함께 초기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에 뛰어든 인물. 후술하듯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분열할 때 레닌에 반대하며 멘셰비키에 가담 

 

 

이 와중에 1898년 3월 민스크(당시 러시아제국 서부의 도시. 현 벨라루스공화국 수도)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러시아 국내 운동 상황은 노동자 투쟁을 정치적 해방투쟁에서 분리시키려는 ‘경제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노선은 노동계급운동을 경제투쟁에 한정하고 정치투쟁은 자유주의 세력에게 맡김으로써 결국 사회주의 운동을 ‘먼 미래의 일’로 미뤄두는 개량주의로 귀결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을 위시해 개량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하는데도 당 지도자 카우츠키가 생각보다 관대한 태도를 보이자, 이에 충격을 받고 위기의식을 느낀 플레하노프(초기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의 지도자. 지난 연재 참조)는 1900년에 이르러 ‘경제주의자들과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레하노프는 경제주의자들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직, 곧 당의 필요성을 부정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노동계급 대중으로부터 당의 독자성을 유지해 의식 수준을 보전하길 원했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앞서고’, 그 당은 정통이론가들이 지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노동계급은 ‘경제투쟁에 묶여 있던 노동자 대중’(노동조합 포함)을 의미하는데, 이 흐름은 ‘경제주의’에 대한 반(反)편향으로 지식인과 노동자를 분리하는 논리를 낳았고, 종국에는 당과 노동계급을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 레닌:

경험주의 경향에서

합리주의 경향으로

 

레닌(V.I. Lenin, 1870~1924. 본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랴노프(V.I. Ulyanov).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도 처음엔 다른 맑스주의자들처럼 인민주의에 이끌렸다(‘인민주의’에 관해서는 지난 연재 참조). 그러나 1890년 이후 경제주의로 흘러가는 인민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계급 의식을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방법과 조직 원리를 면밀히 연구하게 된다.

 

레닌의 1895년 저작 「“인민의 벗”이란 누구인가」는 인민주의에 맞선 논쟁의 결실로, 기본 논조는 다음 3가지 점에서 플레하노프가 대변하던 러시아 정통 맑스주의와 일치했다(레닌과 플레하노프의 차이는, 당시 레닌이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적 역할과 농민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 좀 더 낙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첫째, 인민주의자들(“인민의 벗”이라 불린 세력)은 전제군주정을 타도하고 급진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에서는 협력자가 될 수 있지만, 사회주의 확립 과정에서는 투쟁 대상이다.

 

둘째, 농민층이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농촌 부르주아로 분화함에 따라, 농민들은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의 사상에 더욱 개방적으로 되고 있다.

 

셋째,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인구 전체의 유일하고도 당연한 대표이다. 당연하다 함은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어느 부문에서나 본성상 자본주의적으로서’ 대부분의 생산자들에 대한 착취가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이며,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미분화된 상태에 있는 반면, 공장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는 대규모적이고, 사회화되고,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1

 

레닌은 1896년에 체포되어 유배당했다. 그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을 집필한다. 레닌은 여기서 노동계급 의식의 발전과 ‘사회민주당’의 발전이 러시아 경제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 책은 러시아에서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가 출현하는 과정에 대한 매우 실증적인 연구로, 맑스가 미완으로 남긴 저서 『자본론』 제3권에 틀림없이 포함했을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내시장이 확대되기에는 임금이 지나치게 낮다’는 이유로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본 인민주의자들과 반대로, 레닌은 이 책에서 러시아가 ‘이미’ 자본주의 국가라고 강조했다.

 

레닌은 1900년 초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온 직후 국경을 넘어 망명한다(당시 러시아 혁명운동의 여러 지도자와 그룹이 차르 정부의 탄압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다). 여기서 그는 우선 사회주의 운동의 시급한 과제가 경제주의에 맞서 정통 맑스주의 세력의 힘을 모으는 일이라 생각해 플레하노프의 투쟁을 지원했고, 이 사업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기관지 <이스크라>(Iskra, ‘불꽃’을 뜻함)를 창간한다. 이어 레닌과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밖의 망명자들이 1895년 결성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해외연맹’과 결별했다. <이스크라>는 ‘해외연맹’의 경제주의 경향을 비판했고, ‘해외연맹’은 거꾸로 <이스크라>가 노동계급 대중운동에 대해 권위주의‧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다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 분열은 얼마 뒤 1903년에 벌어진 볼셰비키/멘셰비키(러시아어로 ‘볼셰비키’는 ‘다수파’, ‘멘셰비키’는 ‘소수파’를 뜻함)의 분열을 예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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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레닌과 플레하노프 등이 창간한 기관지 <이스크라> 제1호. [사진: wikipedia]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앞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1898년 탄생했다고 언급했는데, 그 직후 차르 정부의 대대적 탄압으로 당은 사실상 붕괴 수준의 위기를 겪게 된다. 이에 <이스크라>를 중심으로 조직된 활동가들은 당 재건에 힘을 쏟았고, 그 결과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당 대회를 조직해냄으로써 실질적인 당 운동이 궤도에 올랐다. 그런데 바로 그 2차 당 대회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는 2개의 경향으로 분열했다.

 

2차 당 대회 조직화를 주도했던 <이스크라> 편집국은 당 강령 문제로 내부 불화를 겪었다. 논쟁을 야기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① 자본주의가 러시아에서 이미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되었는가 여부, 그리고 이와 결부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당의 태도 문제. ② 장래에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관계 문제(이 시점에서 레닌은 초기 생각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대한 농민의 지원’이라는 문제에서 플레하노프보다 훨씬 적은 신뢰감을 나타냈다). ③ 당과 프롤레타리아의 관계 문제.

 

그런데 분열을 촉발한 직접적 원인은 ‘당원에 관한 규약’의 차이였다.

 

레닌이 규정한 ‘당원’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며, 재정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당의 어느 한 조직에 직접 참여함에 의해 당을 지원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마르토프**의 ‘당원’ 규정은 ‘당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재정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당의 어느 한 조직의 감독과 지시 하에 정기적으로 활동함에 의해 당을 지원하는 사람’이었다.

 

** L. Martov, 1873~1923. 레닌, 플레하노프와 함께 <이스크라>를 창간했으나, 1903년 2차 당 대회에서 레닌과 분열하며 멘셰비키 지도자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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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 1년 전인 1897년, 당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맑스주의 조직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성원들. 의자에 앉은 사람 중 가장 오른쪽이 마르토프, 그 바로 왼쪽이 레닌이다. 두 사람은 초기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에서 함께 활동했지만, 1903년 2차 당 대회를 기점으로 각각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지도자가 되어 이후 끝까지 대립한다. [사진: wikipedia]

 

 

 

마르토프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합리론 경향을 띠었다. “(나는) 당원의 개념을 좁히는 반면, 마르토프의 초안은 그것을 확대시킨다. 왜냐하면 (마르토프 자신이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듯이) 그의 개념적 특징은 그 ‘탄력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탄력성’을 운위하는 것은 다만 혼란, 동요, 그리고 기회주의의 제 요소에 문호를 열어주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2

 

이에 반해 레닌에 대한 마르토프의 비판은 경험론 경향을 보였다. “(레닌의 초안은) 비합법적 조직에 가입할 수 없으나, 당에 공명하고 원조를 제공코자 하는 많은 지식인들을 배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과 대중 사이의 고리 역할을 하면서 형편상 조직에 가입할 수 없는 다수의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들도 배제하였다.”3

 

양측의 대결에서 마르토프 안이 근소한 차이로 채택됐다. 그렇다면 왜 레닌 쪽이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가 된 것일까? 규약에 관한 표결 이후 레닌은 대회 막바지에 진행된 지도부 선출 안건에서 중앙위원회, 특히 (해당 대회가 ‘중앙기관지’ 위상을 부여한) <이스크라> 편집국 인원을 각 3명(기존 편집국은 6명)으로 축소하고 이후 충원을 통해 재구성하자는 데 전력을 다했다. 지도부의 중앙집중성을 강화하는 한편, 기존 <이스크라> 편집국에서 활동력이 떨어지던 ‘늙은 감시인’들을 쫓아내고자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규약에 관한 표결 때 마르토프에게 손을 들어준 일부가 대회에서 퇴장했고, 그 결과 레닌파가 다수를 점해 ‘볼셰비키’가 됐으며 반대로 마르토프파는 소수파, 즉 ‘멘셰비키’가 됐다.

 

2차 당 대회 이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갈등이 점점 격화하는 가운데, 1905년 혁명(1차 러시아혁명이라고도 불림)을 거치며 양측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멘셰비키가 급진 자유주의자들과 더욱 긴밀히 제휴하기를 원하면서 농민을 불신한 데 비해, 볼셰비키는 그 반대였다. 여기에서 레닌은 멘셰비키가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주도권’이라는 맑스주의 정통 노선을 포기했다고 격렬하게 논박했는데, 이는 타당한 비판이었다. 다만, 레닌이 멘셰비키에 대해 ‘당을 청산하려 한다’고 공격한 것은 사실과 달랐다. 멘셰비키는 (비합법 활동과 함께) 합법 활동으로 대중정당을 건설하려 했고, 볼셰비키 역시 이후에는 일정하게 같은 정책을 취하게 된다(다음 연재에서 계속).

 

 

 

 

1 V. Lenin, “What the Friends of the People Are”, Collected Works, vol. 1, p.299. 『마르크스주의 논쟁사』(D. 맥렐런 지음, 안택원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1994), 105쪽에서 재인용.

 

 

2 V. Lenin, “Speech on Party Rules”, Collected Works, vol. 6, p.500. 앞의 책, 107쪽에서 재인용.

 

 

3 L. Martov, Geschichte der Russischen Sozialdemokratie (Berlin, 1925), p.84. 앞의 책, 108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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