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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1.10.0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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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레반을 피해 카불 공항으로 몰려든 아프간 피난민과 공항 주변을 경계하는 미군. [사진: wikipedia]

 

[번역]

 

 

9/11의 유령과

아프가니스탄 위기

 

 

* 번역자: 지난 8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20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2001년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앞세워 거침없이 이 지역을 점령했던 미군은 20년이 지나 혼란으로 가득한 철수현장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듯 서둘러 후퇴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전세계에 드러냈다. 그러나 제국주의 모순도, 아프가니스탄 위기도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첨예해지는 모양새다.

 

이에 <변혁정치>는 최근 아프간 사태를 분석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기사는 좌파 매체 <Left Voice> 9월 11일 자로 게시된 Maryam Alaniz의 글 “The Specter of 9/11 and the Crisis in Afghanistan”을 압축해 번역한 것이다.

 

본문 가운데 소괄호()는 원문에 있는 것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독해 편의를 위해 문장을 자른 것이고, 대괄호[]와 주석은 번역자가 덧붙인 것이다.

 

 

- 번역: 기관지위원회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인 2001년 말, <타임 Time>지는 “탈레반 최후의 날”이라는 문구로 자랑스럽게 표지를 장식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주류 매체는 거꾸로 아프간에서의 “미국 최후의 날”을 분석하는 심층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이 전쟁은 거의 20년이 지나 이제 역사 그 자체의 한 부분으로 남게 됐다.

 

미국이 20년에 걸친 전쟁으로 약화된 자신의 국제적 입지를 회복하려 함에 따라, 과거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혀 CIA[미국 중앙정보국]의 고문을 당했던 이들[곧, 미국에 붙잡혔던 탈레반 주요 인사들]이 현재 새로 들어선 반동적인 아프간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철군(상징적으로 9/11 20주년에 맞춰 완료하도록 설계했다)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불러왔다. 바이든에 대한 지지율은 아프간 위기의 영향으로 8%P 급락하며 집권 이래 최대 낙폭을 기록했고, 처음으로 지지율이 50% 아래로 떨어졌다.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을 둘러싼 비극에 관해 미국 민주-공화 양당은 서로를 비난했다. 그러나 아프간 침공과 이후의 철군은 양당이 초당적으로 수행한 사안이었다. 트럼프와 바이든은 서로를 겨냥해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는 데 “무능”했다고 공격하지만, 실제 이 재앙은 제국주의 양당 출신 대통령 가운데 최소한 4명의 손을 거친 것이다.

 

한편, 몇몇 군사 전문가와 제도권 인사를 포함해 미국 부르주아 지배세력 일부는 이번 철군이 야기한 혼란에 대응해 반동적인 주전론(主戰論)을 펼치고 있다. 당면한 현실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헨리 키신저1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사례다.

 

 

 

1 Henry Kissinger, 1923~현재. 1970년대 미국 공화당 정권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 등을 역임하며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정책 총괄.

 

 

이 대외정책 “전문가들”은 미 제국주의가 저지른 잔혹행위와 더불어 애초에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 과정을 간편하게 무시한다. 급진 이슬람이 어떻게 미국의 주요 적대세력이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석유자원이 풍부한 중동지역에서 유일무이한 패권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자리하고 있다. 1978년 이란 혁명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이란 내 석유자원에 대한 접근권 상실은 물론이고) 중요한 역내 거점이자 고객을 잃게 됐으며[혁명 이전의 이란은 친미 왕정 독재 국가였다], 인근 지역으로 대중의 혁명적 정서가 확산할 위험도 생겼다. 그러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여타 걸프 국가[페르시아 만에 인접한 산유국], 그리고 파키스탄과 동맹을 맺고 아프간 무자헤딘[이슬람 무장조직]을 지원함으로써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게 했다. 그리고 몇 년 사이에 이 이슬람주의 게릴라 파벌들은 미국의 주적이 됐다.

 

이렇게 미국이 후원한 “지하드 영웅”[‘지하드’는 이슬람에서 종교적인 ‘저항’이나 ‘투쟁’을 의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이후 걸프전쟁2에서 사우디와 미국의 동맹이 강화되자, 빈 라덴은 결정적으로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된다. 그는 쿠란[이슬람 경전]에 따르면 이슬람 최고 성지 두 곳[메카, 메디나]이 자리한 아라비아반도에는 비(非)무슬림[‘무슬림’은 이슬람교도를 의미]이 발을 들이는 게 금지된다며 미군의 진주를 규탄했다.

 

 

 

2 1990~1991. 이라크가 친미 국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과 사우디를 비롯한 다국적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한 전쟁.

 

 

하지만 굳이 알카에다[1980년대 말에 빈 라덴이 창설한 이슬람 무장조직]가 아니더라도 이슬람권에는 뿌리 깊은 반미 정서가 퍼져 있었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제국주의‧시오니즘3 정책과 더불어 중동지역 전반에 걸쳐 미국이 억압적 독재 정권을 수립하고 지원한 결과였다. 결국, 급진 이슬람주의 운동의 발흥은 이 지역에서 벌어진 급진화 과정의 왜곡된 표현이다. 이 현상은 (특히 신자유주의 공세기에) 노동계급운동의 후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비로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제국주의 국가와 반(半)식민지 국가 모두에서 [노동계급운동의] 전위세력은 제국주의 피억압 민중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3 ‘시오니즘’은 배타적 유대인 민족주의를 가리키며,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억압과 인종 청소를 뒷받침하는 이념.

 

 

이러한 모순이 극히 반동적인 형태로 발현된 게 알카에다였다. 이들은 9/11 공격을 감행하며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인 타깃으로 삼았고, 결과적으로 9/11 사망자 대부분은 제국주의 정부가 저지른 범죄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노동자들이었다(가령, 9월 11일 당일 쌍둥이빌딩[테러 공격으로 붕괴한 뉴욕 세계무역센터]에는 400명 이상으로 추산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이 공격은 냉전 종식 이후 약 10년간 확고했던 미국 헤게모니가 이미 상대적 쇠퇴 기미를 보이던 순간에 벌어졌다. 이에 따라 9/11은 (국제 정세로 보나 미국 국내 상황으로 보나) 이미 고조하고 있던 모순을 더욱 격화시켰다.

 

미국은 9/11의 연막을 활용해서 반동적‧일방적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당시 부시 행정부의 호전적인 네오콘[신자유주의와 군사적 패권주의를 앞세운 ‘신보수주의’] 세력이 미국의 세계적 입지를 더욱 공격적으로 재확인하기 위해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군사행동에 돌입한 미국은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점령했다. 탈레반 정부를 축출함으로써 알카에다의 안전한 활동 기반을 제거하고 조직을 해체시킨다는 명분이었다. 과거 소련 공군기지였던 바그람[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북쪽 약 60km 지점에 위치하며, 1979년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며 공군기지로 활용한 바 있음]은 영국의 지원으로 순식간에 [미군이] 장악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렇게 또다시 미국의 대외 개입을 위한 뒷마당이 됐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보자면, 서구 사회의 가장 “임박한 위협”은 거의 하룻밤 만에 ‘공산주의’에서 ‘이슬람’으로 바뀌었다. 또한, 9/11은 자유주의 평론가들이 [냉전 종식과 함께] ‘평화롭고 세계화된 세상이 눈앞에 왔다’며 떠들어댄 “역사의 종언” 운운에 일격을 가했다.

 

9/11의 결과로 벌어진 아프간 전쟁은 시작일 뿐이었다. 미국은 뒤이은 2003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비슷한 명목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네오콘은 석유자원을 보유한 이 나라에서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다. 극도로 불안정해진 중동의 지정학적 모순은 시리아와 예멘에서도 대리전을 불러왔고, 이번에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구실로 개입했다. 미 제국주의의 공격을 받은 나라에 살던 민중에게 21세기의 시작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제국주의 개입의 결과는 더 많은 죽음과 파괴, 고통이었다.

 

9/11 이후의 맥락을 보자면, 미 제국주의의 강경 노선은 정치 정세가 고조한 미국 내에서는 코인텔프로 시대4 이후 가장 극심하게 인권과 민주적 자유를 탄압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감시 체계와 공안통치 수단이 무지막지하게 팽창했고, 고문 합법화와 무슬림 탄압도 동반했다.

 

 

 

4 ‘코인텔프로’(COINTELPRO)는 ‘방첩 프로그램’을 뜻하는Counter Intelligence Program’의 약칭으로, 1950~60년대에 걸쳐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사회주의운동과 민권운동, 흑인운동 등 국내 저항 정치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자행한 체계적인 공작을 가리킴.

 

 

당시 미국에서는 아프간에 대한 군사행동 찬성 여론이 88%에 달할 정도로 전쟁 지지 흐름이 광범하고 강력하게 형성됐다. 9/11 직후에는 미국의 정치‧문화적 기질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부터 애국주의 경향의 노조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아프간] 전쟁에 찬성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때와 비교하면 반전(反戰) 시위 규모도 작았다(아프간 전쟁과 달리, 이라크 전쟁은 미국에 대한 공격과는 관련이 없었다).

 

2021년 현재로 돌아와 보면, 이 최장기 전쟁은 이제 대다수가 가장 싫어하는 전쟁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에서 “끝없는 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한 건 이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트럼프 행정부는 아프간에서 철수하기 위한 밑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바이든이든 트럼프든, 뭔가 진보적인 이유 때문에 철군을 단행한 게 아니다. 이번 철수는 중동지역을 넘어 훨씬 큰 규모로 다가올 거대한 대립, 즉 흥기하는 중국과 쇠락하는 미국 사이에서 격화하는 긴장의 부산물임을 분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미국의 새로운 악령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 지정학적 정세에서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미 제국이 쇠퇴하는 가운데 중국이 서서히 발흥한 것이다. 이 흐름이 강화되면서 이슬람 혐오(무슬림 세계에서 “문명의 충돌”이 벌어진다는 식의)를 대신해 중국에 대한 적대 경향이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전략적 계산으로 보면, 아프간 철수는 후퇴임과 동시에 재배치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전 제국주의 정부에서 시작한 일을 끝내려는 건 전쟁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커져가는 중국과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작금의 위기는 이러한 전략적 재편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버락 오바마 역시 전쟁 종식을 약속하며 ‘아시아로의 회귀’를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바마는 시리아, 예멘, 리비아, 소말리아, 이라크에 대한 폭격을 곱절로 늘렸을 뿐이다(이런 자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게 아이러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이 더 이상 “세계 경찰” 노릇을 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제국주의와 개입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그대로 남는다. 이는 최근 바이든이 아프간에 대해 신속한 폭격을 승인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제국주의 국가의 전략적 패권 경쟁]이 끝난 건 아니지만, 미국 군사정책 입안자들은 지난 20여년동안 게릴라들과 벌인 전투를 뒤로 하고 이제 점증하는 미‧중 경쟁에 대비해 전쟁에 대한 전통적 접근으로 회귀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제출한 역대 최대 규모 국방예산이 입증하듯, 이는 (아프간 철군의 결말이 영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 제국주의가 군사력을 축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배가할 것임을 시사한다.

 

아프간 위기가 불러올 총체적인 지정학적 영향을 파악하려면 아직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 위기를 계기로 미국 헤게모니가 약화하고 라이벌 국가들(중국, 러시아, 파키스탄, 이란 등등)의 기세가 오르는 흐름은 분명 가속할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탈레반은 차악을 의미한다. 중국 정부는 초기에 아프간 신(新)정부를 인정하는 데 조심스러워하긴 했지만, 최근에는 스스로 탈레반의 주요 외교 파트너임을 확고하게 자임하고 있다. 이는 국제적 승인과 경제 원조가 절실한 탈레반 지도부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진다. 얼마 전 중국은 파키스탄‧이란‧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아프간 인접국 외무장관들을 초청해 회의를 열고, 이 자리에서 구호 식량과 코로나 백신을 포함해 최소 3,100만 달러 규모의 긴급 지원을 발표했다.

 

그러나 탈레반에 대한 중국의 실용적 접근에는 위험도 딸려 있다. 일단 중국 스스로가 무슬림 위구르 주민을 겨냥해 “극단주의”라는 이유로 잔혹하게 탄압하는 상황에서, 코앞에 과격한 이슬람주의 집단이 존재하는 건 우려스러운 일일 것이다. 또한, 악명 높은 탈레반과 긴밀한 협력을 지속하면 중국 인민뿐만 아니라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반(半)식민지 국가의 민심도 등을 돌릴 위험이 있다. 게다가 탈레반과 관계가 깊어지면서 당초 중국의 소프트파워[군사력‧경제력을 비롯한 물리적 강제가 아니라 외교‧문화‧예술‧기술 등으로 헤게모니를 얻는 것]를 강화하기 위해 마련한 백신 외교 프로그램이 난항을 겪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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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중국은 발 빠르게 탈레반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 7월 28일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탈레반 2인자(사실상의 지도자로 꼽히기도 함)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접견했다. [사진: 중국 외교부]

 

 

 

아프간 투쟁의 앞날

 

탈레반 권력이 점점 강화하는 가운데 최근 몇주 동안 그에 맞선 저항이 늘어나고 있다. 시위의 주축은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난 여성과 청년들이다. 극심한 탄압에 직면해 분산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잔인하고 반동적인 탈레반 정권에 도전하는 전국적 운동을 촉발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수도 카불을 비롯해 그보다 작은 여러 도시에서 각각 수십~수백 명씩 모여 저항 시위를 벌였고, 대부분 “자유”라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탈레반은 실탄을 쏘며 시위를 해산시켰다. 100명이 넘는 시위 참가자와 언론인이 부상을 입었고, 최소한 10명이 살해당했다(비공식 수치로는 더 많을 것이다).

 

시위가 확산하자 탈레반은 이를 금지하려 했다. 체포자 수가 증가했고, 시위 참가자들은 포화 상태의 감옥에 갇혀 학대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혔으며, 지역 활동가들은 온라인으로 더욱 많은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이렇듯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일부 아프간인과 몇몇 좌파조차 ‘아프가니스탄 국민저항전선(National Resistance Front of Afghanistan: NRFA)’을 지지하며 여기에 희망을 걸고 있다. 하지만 이 집단에 무언가를 기대해선 안 된다. NRFA는 과거 ‘북부동맹’5을 계승한 세력으로, 유명한 아프간 게릴라 사령관 아흐마드 샤 마수드6의 아들이 이끌고 있다. 이들은 타지크족 인구가 다수를 이루는 판지시르 주(州)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데, 이곳은 아프가니스탄 34개 주 가운데 탈레반이 가장 마지막에서야 함락시킨 지역이다. NRFA가 탈레반을 적대하긴 하지만, 많은 아프간인의 기억 속에 북부동맹은(1990년대 초에 이들이 잠시 집권했던 이후를 떠올리면) 탈레반 못지않게 억압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다.

 

5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의 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 구원을 위한 이슬람연합국민전선’(United Islamic National Front for the Salvation of Afghanistan)으로,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탈레반에 의해 축출된 이전 정권 세력과 몇몇 군벌이 결집해 형성한 반(反)탈레반 무장집단. 이들의 근거지가 판지시르 주를 비롯한 아프간 북부에 있었기 때문에 ‘북부동맹’이라 불림.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하자, 이 세력의 일부는 새로 들어선 친미 아프간 정권에 가담.

 

 

 

 

6 Ahmad Shah Massoud, 1953~2001.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 당시 소련군에 대항한 무자헤딘 게릴라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타지크족 출신. 반공 이슬람주의 성향을 띠었으며, 1992년 무자헤딘 세력이 친소련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슬람주의 정권을 세우는 데 기여하며 국방장관이 됨. 그러나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자 자신의 근거지인 판지시르 주에서 반군을 이끌며 북부동맹 지도자가 되었고, 2001년 9/11 직전 (9월 9일) 알카에다에 의해 암살당함.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이들은 미 제국주의와 결탁해 미군 점령기 내내 중간상인으로 행세하며 막대한 이윤을 수취하는 한편 아프간 주민들에게 제멋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NRFA가 후퇴하는 만큼, ISIS-K7 같은 또다른 우익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탈레반 정권에 불만을 품은 사람을 모집하려 할 것이다. 이들 집단은 결코 아프간 민중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7 극단 이슬람주의 조직 ISIS(자칭 ‘이슬람국가’)의 아프간 지부로, ‘IS호라산(Khorasan)’이라고도 불림(‘호라산’은 역사적으로 지금의 이란-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 등지를 포괄하는 지명). 최근 미군 철군 와중에 벌어진 카불 국제공항 테러의 배후를 자처.

 

 

지난 10년간 중동 인근의 광범한 지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잇따랐다. 이들이 열망한 정치적 대안은 알카에다‧탈레반‧ISIS 같은 반동적 근본주의 집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란 녹색운동[2009년 이란에서 벌어진 반정부 저항운동]과 아랍의 봄[2010년대 초반], 나아가 최근 레바논‧이라크‧팔레스타인에서의 시위를 촉발한 계급투쟁 물결은 역내 불안정과 제국주의적 개입에 맞서고자 하는 광범한 층의 투쟁 의지를 대변한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 속에서 자라난 청년세대는 이런 현실을 가장 날카롭게 감지하고 있다. 아프간을 포함해 이 지역은 세계에서 청년인구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이다. 더 나은 삶의 기회를 가질 수도 없었고 지금의 부패한 체제에 어떤 부채의식도 없는 이 청년세대는 여러 중요한 투쟁의 선두에 용감하게 나서고 있다.

 

청년‧여성과 더불어, 아프간 하자라족처럼 억압받는 소수민족(파슈툰족이 주류인 탈레반은 종족주의를 바탕으로 하자라족을 탄압해왔다) 역시 투쟁을 통합하고 추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피억압 민족과의 동맹은 이 지역의 여러 소수민족이 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프간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들이 직면한 위기를 벗어날 길은 오직 하나다. 이들 모두와 함께 노동자들이 바로 그 억압과 착취 체제를 지키려는 적들에 맞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겠다고 일어서는 것이다. 이 주체들이 민주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해야 함은 물론이고, 어떤 제국주의적 외부 간섭으로부터도 독립해서 자국의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이런 투쟁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 지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의 노동자와 억압받는 이들이 아프간 민중의 싸움에 적극적 연대를 보내며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는 파키스탄 등 탈레반에 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제재 요청 같은 제국주의적 수단을 사용하자는 게 아니다. 가령, 파키스탄에 대한 제재는 그곳에 사는 아프간 난민 수백만 명을 포함해 피억압 민중을 더욱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기와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

 

1960년대 당시 노동자와 청년들이 반전(反戰)운동에 참여했던 것을 상기하며, 우리는 새로운 반(反)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이는 9/11 20년이 지난 지금 더욱 시급한 과제다. 현재 아프간은 더 많은 폭격을 동반한 인도주의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9/11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난 전투적 청년세대와 함께, 앞날을 내다보며 바로 지금부터 반제국주의 운동의 기반을 만들자. 우리의 투쟁은 아프간과 중동에서의 미군 철수를 넘어 전세계 모든 미군기지 폐쇄를 위한 싸움이며, 미국 헤게모니와 자본가들의 이윤에 그토록 핵심적인 전쟁기구에 맞선 싸움이고, 세계 곳곳에서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적들에 맞선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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