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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1.07.19 17:28

“어쩌다 공정!?”

 

변혁당 충북도당 정치 강좌

<불평등사회 뒤집기> 시리즈 첫 번째

 

 

김성봉┃충북

 

 

 

변혁당 충북도당은 매년 상‧하반기 정치 강좌를 개최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정치 강좌를 준비했지만, 예년과는 조금 다르게 기획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불평등사회 뒤집기> 시리즈다.

 

시리즈로 기획한 <불평등사회 뒤집기> 정치 강좌는 시대적 화두나 이슈를 중심으로 현실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 사회로 가는 길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또한, 변혁당이 제기하는 ‘사회주의 대중화’의 장을 마련하고 토론해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처음 이 강좌를 기획하면서 많은 주제가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여기저기서 회자하는 ‘공정성’을 첫 주제로 정했다.

 

누구나 ‘이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모두가 공정한 세상을 원한다고 하지만, 무엇이 ‘공정’인지는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경쟁, 능력주의, 차별, 배제, 불평등이 익숙한 이 세상에서 ‘공정’이란 말속의 ‘숨은그림찾기’부터 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정치 강좌 “어쩌다 공정!?”을 기획한 이유다. 이로써 우리는 ‘공정성’ 논리를 소환한 능력주의 뒤집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번 강좌는 지난 6월 7일 변혁당 충북도당사에서 열렸다. 안타깝게도, 정치 강좌 내용을 이 지면에 모두 소개하기란 어렵다. 그렇기에 이 글에 앞서 지난 <변혁정치> 126호(5월 15일 자)에 실린 “이슈: ‘MZ’의 분노, ‘공정성’이 시대정신?” 기사를 꼭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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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라 말하고

‘자격’을 묻는다

 

‘공정성’ 논리의 핵심은 능력주의다.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만 자격을 주는 것’이 곧 ‘공정’이라는 논리다.

 

이 논리의 흐름은 대충 이렇다: ‘사람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대우해야 한다. 그런데 그 능력을 주관적으로 측정하기는 어려우니,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시험을 잘 보면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에서 시험의 결과는 노력의 산물이며,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꽤 많은 사람이 ‘공정성’ 담론을 빌린 능력주의를 굉장히 강하게, 그리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이유는 ‘시험이 노력의 산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단 시험의 기회가 주어지면, 그 결과는 각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능력주의는 한발 더 나아간다. ‘블라인드 채용은 능력도 블라인드 처리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반대한다. 학력도 능력인데 왜 블라인드 처리해?’라고 말이다.

 

이렇듯 현재 ‘공정’을 앞세운 각종 주장은 결국 능력주의로 귀결한다. 그 능력주의는 경쟁과 시험, 학벌, 승자독식 등으로 모든 사람의 ‘자격’을 따지고 구분하며 차별할 뿐이다.

 

 

 

능력주의의 결과는 처참하다

 

이러한 ‘능력주의’가 불러온 파멸적 결과를 한번 살펴보자.

 

문제가 가장 두드러진 곳은 바로 공공부문이다. 공공성을 최우선시해야 할 공공부문에서, 능력주의는 공공성을 파괴하기 위해 도입한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이러면서 공공부문을 넘어 민간기업에서도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더욱 난관에 부닥친다.

 

이뿐만 아니다. 재산이 적거나 없어서, 나이가 많거나 적어서, 여성이거나 장애인이거나 이주노동자여서, 작은 사업장 노동자이거나 비정규직이어서, 지방대나 전문대 출신이어서, 심지어 특수고용 노동자처럼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일 뿐’이라고 해서 배제된 사람들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속에서 기본적 권리마저 빼앗긴다.

 

공공의대 반대, 변호사시험 제한, 공기업 채용 축소, 바늘구멍 취업시장 등에서 드러나듯 이미 기득권을 획득한 집단은 담벼락을 더욱 높여 치열한 경쟁을 조장하고 있다.

 

이렇듯 능력주의와 엘리트주의는 마치 고대 로마 시대 검투장처럼 수많은 사람을 검투사로 내몰아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연출하면서 흥분하고 즐거워한다.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검투장에서 칼을 쥐고 서로 살육을 벌이는 검투사에 불과할 뿐이다. 불안정노동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신분 상승’의 유일한 기회로서 경쟁과 시험 외엔 그 어떤 방법도 허락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지금 쾌재를 부르고 있다.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만든 검투장에서 설령 한번 또는 몇 번 승리한다고 한들, 여전히 검투사 신세를 면할 순 없다(고대 로마에서도 많은 검투사가 노예 신분이었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이 체제는 ‘불안정노동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각자 알아서 능력을 키우라’고 끊임없이 조장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애초부터 다른 길이 필요하다. 차별과 능력주의로 쪼개지고 위계화된 우리의 일터와 삶터를 바꿔야 한다. 검투장의 검투사가 되라는 자본주의의 강요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권리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전리품’이 아니다. 전리품으로 전락하는 순간, 권리는 특권이 된다.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권리를 우리 힘으로 되찾고, 지키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안정적으로 일하며 생활임금을 받고, 단결해서 노동조건을 바꾸고, 사회‧문화생활의 주체로 살고, 차별받지 않으며, 정치의 주체로 세상을 바꿀 권리가 있다.

 

그 보편적 권리를 위해 능력주의를 넘어서려는 모든 사람의 저항에 주목하고 함께 하자.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다.

 

검투장을 박차고 나와 싸우고 승리하는 스파르타쿠스*가 되자.

 

 

 

*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로마 시대 노예 출신 검투사로, 자유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켜 로마군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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