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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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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소개하는 책>

김산‧님 웨일즈(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2005.

 

 

고근형┃기관지위원회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은 이중으로 지워진 독립운동가다.

 

첫째, 그는 무정부주의자였으며 사회주의자였다. 1920년대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투사가 사회주의자였고, 그들은 6.10만세운동(1926)이나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등 주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한국 정부의 훈장을 받은 게 불과 십수 년 전 일이며,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 역시 영화 <암살>(2015)에 등장한 김원봉(『아리랑』 본문에선 ‘김약산’으로 언급) 정도다.

 

둘째, 그는 중국공산당 당원이었으며 그의 주 무대도 중국 영토였다. 1920년대 이후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에서 조선공산당의 수차례에 걸친 성립과 해산이나 이재유를 비롯한 “경성 트로이카” 활동 등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시기 중국혁명에 참여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는 어쩌면 더욱 낯선 존재일지도 모른다.

 

 

 

서사로 만나는 사회주의자

 

김산이 구술하고 님 웨일즈(미국 언론인)가 쓴 『아리랑』은 이렇듯 이중으로 지워진 사회주의자를 단숨에 독자 앞에서 생생하게 그려낸다. 당시 사회주의자는 물론이고 독립운동가가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공개한다는 건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런데 김산은 왜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을까? 이 책의 서장에서 님 웨일즈는 이 문제에 관한 김산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저는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해외의 조선 동포들, 뿐만 아니라 영국인과 미국인까지도 이 책을 읽고 조선이 소송에서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주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것으로 내가 고통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 『아리랑』 45쪽.

 

 

말하자면 김산은 자신과 동지들의 투쟁에 대한 공감을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그는 자전적 서사를 선택했다. 자기 서사를 글로 정리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신의 삶과 투쟁을 이해해주길 바랐던 셈이다. 물론, 모든 서사가 독자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 역시 인간이기에, 대개 인간적 삶과 경험에 공감하게 된다. 그 가운데 인간적 욕구와 감정이 풍부하게 묻어날수록 공감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커진다.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 그 욕구가 좌절되었을 때의 분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고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희로애락 같은 것 말이다.

 

김산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결코 자신을 ‘영웅적 존재’로 포장하지 않는다. 『아리랑』 곳곳에서 그는 철저히 ‘인간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인간에 대한 경외를 말한다. 스스로 무오류의 존재가 되길 거부하고, 오히려 ‘오류’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역설한다. 자신이 과거에 갖고 있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부분도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치미는 분노에 몸서리치는 대목도 눈에 띈다. 이렇듯 『아리랑』은 인간의 서사이고, 독자는 어느새 이중으로 지워졌던 사회주의자 김산에게 공감하며 그를 응원하게 된다.

 

 

 

더 많은 서사를

찾아낼 수 있다면

 

김산의 『아리랑』은 중국공산당 내부 갈등의 지형을 보여주는 한편, 중국으로 몸을 피해 살아가던 당대 한인들의 삶과 일상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의의는, 잊고 있던 재중(在中) 사회주의자의 복권인지도 모른다. 사회주의에 부정적 인식을 가진 독자라도 책을 읽는 동안은 김산의 관점에 공감할 수 있다. 물론, 김산의 이야기만으로 인식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계기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조선 민족의 해방을 바랐던 김산이 왜 중국공산당에 참여했는지, 한‧중‧일 피억압계급의 연대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해볼 수 있다.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독자 역시, 조선공산당과 경성 트로이카 바깥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펼쳐보는 한편 재중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치열했던 삶과 투쟁에 이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오늘날로 확장해보면, 필자는 더 많은 주체의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수의 사람은 다양한 이유로 인간적 욕구를 억압당하고 있다. 일자리가 없거나 불안정해서, 나이가 어려서, 소수자라서 등등의 이유로 말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 그 억압을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은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새롭게 확산하던 형태의 억압이었지만, 오늘날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심지어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주장이 ‘공정성’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제기될 정도다. 이런 ‘당연함’에 반문을 던지고 비판을 끌어내는 것이 서사의 힘이다. 김산이 독자 앞에 돌아왔듯, 인간적 욕구를 부정당하는 수많은 이들이 돌아와야 한다. 이들의 서사를 정치적 전망과 연결시키는 일이 바로 지금 사회주의자들의 역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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