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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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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1.04.07 21:09

사회주의 대중화, 그 역사적 의의

 

 

이종회┃대표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이은 피비린내 나는 민간인 학살은 우리에게 몸서리치는 기시감을 가져다준다. 80년 광주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군부를 포함한 보수세력과 이를 방조‧지원한 미국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의 좌절을 거치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은 자의 몫을 다하고자 했다.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반성적 평가를 통해 한국사회 변혁에 대한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면서, 민주화운동에서 변혁운동으로 정치적 도약을 시도했다.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은 공황에 접어들었던 70년대 말 한국 정치‧경제를 배경으로 한다. 외자에 의존한 수출지향적 경제구조와 중화학공업 중복투자는 세계적 공황과 맞물려 그 위기가 증폭되어 나타났다. 인플레이션이 누적‧심화됐고, 노동자민중의 삶은 위기에 처했다. 이는 박정희 유신체제의 모순과 결합해 YH무역 사건과 부마항쟁*, 10‧26사태(박정희 암살 사건)로 이어졌고,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유신체제 붕괴라는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전두환 신군부는 12‧12쿠데타를 일으켰고, ‘서울의 봄’은 학생운동세력의 ‘서울역 퇴각’으로 패퇴했다. 곧이어 광주가 군부의 총칼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1980년 서울역 회군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은 학생운동의 역할 및 한국 변혁운동의 주체 형성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 시작은 <야학비판>이나 <학생운동의 전망>처럼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문건’으로 시작되어 이른바 “무림”과 “학림”이라는 공안사건으로 드러난다. 이는 80년 서울의 봄을 둘러싼 주화론(단계적 투쟁론)과 주전론(전면적 투쟁론)의 대립의 표현이었다.

 

 

박정희가 죽고 12‧12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한국군의 작전권을 쥐고 있던 미국은 노태우가 사단장으로 있던 전방 9사단 병력의 서울 이동을 묵인했다. 1980년 5월 16일에는 20사단의 광주 배치를 승인하며 광주항쟁을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의 그 유명한 ‘들쥐’ 발언이 있었다. 80년 광주는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자’이고 ‘근대화의 조력자’라던 미국이 한국민에게 달리 다가오게 된 계기였다. 이로써 민족과 외세 문제에 대한 대중적 제기가 시작됐다. 80년 말 광주 미 공보관 방화투쟁, 82년 3월 부산 미 문화원 방화투쟁 등을 거치면서 반미투쟁은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한국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물려 민족-종속 문제에 대한 논쟁도 시작된다.

 

 

80년 이후 정치논쟁과 투쟁을 거치면서, 운동사회에서는 한국사회 분석에 기초한 정치적 전망과 과제에 대한 정리가 시도된다. 가령 83년경 <인식과 전략>이라는 비합법문건은 무장투쟁, 혁명세력, 반제국주의투쟁, 노선갈등 문제를 정리하고 ‘우리 혁명의 성격’을 ‘반제 민족주의, 반파쇼 민주주의, 민중해방, 북한과의 통일혁명’으로 정리했는데, 이는 이 시기에 혁명의 성격과 정치노선의 기초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85년에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서 CNP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이즈음 박현채, 이대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주변부자본주의론에 근거한 한국자본주의 성격 논쟁이 일어났다.

 

 

이어 ‘반제직접투쟁론’을 시작으로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이,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기반한 PDR(민중민주주의혁명)론이 정식화됐다. 이러한 논쟁은 84년 인천 대우자동차투쟁, 85년 구로동맹파업 같은 대중투쟁을 거치며 조직‧전술논쟁 등과 맞물려 진전됐다. 그리고 ‘계획으로서의 전술’로서 제헌의회 소집을 내건 NDR(민족민주주의혁명)론이 등장했지만, 이론적 한계에 부딪혀 이후 사라졌다.

 

 

한편 한국자본주의는 종속이 부차화되고 자립적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있다는 ‘중진자본주의론’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88년 초 ‘3저 호황’(저금리-저유가-저달러를 바탕으로 한 호황)과 외채 감소 등을 경제적 배경으로 인민노련(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 같은 정치조직에서도 중진자본주의론을 받아들이면서 GDR(일반민주주의혁명)론이 보편화된다. 현실사회주의 붕괴를 배경으로 정치적 좌표를 상실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서의 GDR은 자본주의의 발전 그 자체를 진보로 파악하는 자본주의관을 기초로 일반민주주의투쟁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90년대 초부터 ‘노동운동 위기론’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이는 인플레이션 극복 방안으로 전두환 정권 이후 전면화한 통화주의 정책을 배경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전략에 대한 몰이해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자본주의 위기 극복책으로 시작된 플라자 합의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스스로 시민운동을 개척하면서 그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운동사회 내 일부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온갖 ‘포스트주의’를 거치면서 당 건설 노선을 버리는 등 노선 변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NL, PD, GD는 독자 정치블록으로 당적 질서를 구축해 지금껏 이어지며 서로 다른 전략을 내놓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삶의 질곡과 역사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노동자 정치운동의 역사 안에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대중화는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가 아니라, 변혁을 꿈꾼 치열한 고민의 역사에서 비롯한 결과물인 것이다. 사회주의 변혁의 당적 질서를 새로운 대안으로 내놓기 위해.

 

 

 

 

* 1979년, 가발수출기업 YH무역에서 구조조정과 폐업에 맞서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투쟁을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투쟁의 배후에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있다고 지목하고 신민당 당사를 침탈해 노동자들을 유혈 진압하는 한편, 이후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의 정치적 근거지이기도 했던 부산-마산지역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를 촉발했다.

 

 

** CNP는 C(CDR: 시민민주혁명)-N(NDR: 민족민주혁명)-P(PDR: 민중민주혁명) 노선 간 논쟁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변혁 방법을 둘러싼 견해 차이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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