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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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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1.04.07 21:03

자본주의 체제의 자유와 평등은

형식에 불과하다

 

 

배성인┃성공회대

 

 

 

국가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경제위기, 일자리 문제, 보건위생, 자연재해 등 한 개인이 풀어내기 힘든 문제가 주위에 산적해 있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국가가 무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라는 거대 권력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6)에서와 같이 개인의 안녕을 위협하는 괴물 같은 존재로 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총체적 결과는 이른바 ‘무한경쟁 시대의 도래’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특히 19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이르러 자유주의와 ‘현실 사회주의’라는 적대적인 두 세계체제 간의 대립이 종식되면서, 자본주의 경쟁원리가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확립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야만과 전쟁의 부르주아 문명일 뿐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본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는 국가권력을 장악해 자본주의를 바꿔야 하며, 국가에 의해 자본주의 경제와 계급사회를 지양하면 국가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민족의 차이는 세계자본주의의 침투에 의해 소멸할 것이라고 했다.

 

 

 

형식적인 자유와

불평등한 평등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나타났다.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국가는 더더욱 위력을 떨치고 있다. 자유주의를 정치적‧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은 통치형태의 변화와 권력구조 개편 등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경제‧정치적 위기를 돌파해왔다. 즉, 민주주의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노동자들도 자본가처럼 형식적으로는 법 앞에 평등하고 정치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됐다. 가령, 누구나 선거에서 1표씩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대중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하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유포한다.

 

자본주의 국가권력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면서 자유와 평등을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로 내세웠다. 자유와 평등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부르주아지가 인민대중을 반(反)봉건투쟁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을 지배계급으로 등장할 수 있게 한 자유주의의 구호였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란 정치적 자유이며, 평등은 법 앞에서의 평등에 그친다. 물론 현실에서 목도하는바 이 ‘정치적 자유’는 민중이 투표권을 넘어선 정치행위에 나서는 순간부터 제약되며, ‘법 앞에서의 평등’ 역시 ‘1만인에게만 평등하다’라는 말처럼 종종 자본가들에게 치외법권을 보장한다. 이 점에서 자유주의가 천명한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처음부터 지배세력의 계급적 이익에 종속되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모순 가운데 하나는 현실에서 불평등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근대 이후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세속적 이데올로기들이 등장했는데, 이러한 이념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것은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에서 주장하는 ‘평등’이란 다수 대중을 소수 자본가에게 예속시킨 법 앞에서의 평등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사회적 평등을 ‘개인적 자유의 자유로운 행사를 방해하는 걸림돌’로 여긴다. 그나마 이들이 ‘기회균등’을 내세운 것은 노동자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세력의 저항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평등의 개념이 확장됐다. 이후 자유주의에서는 평등을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평등만 보장한다고 해서 진정한 평등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기회균등’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 이는 선천적‧후천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형식적 평등에 불과하며, 실질적 불평등을 가져온다. 자유주의에서 계급적 불평등은 선천적이다. 자유경쟁과 기회균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언제나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음습하게 공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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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주의가 천명한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처음부터 지배세력의 계급적 이익에 종속되는 명백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사진: 노동과세계(송승현)]

 

 

 

자유주의–보수 양당 독점 정치의

법과 제도

 

이러한 체제하에서 좌파세력의 제도정치 참여를 통한 정치권력 장악 기획은 허상에 불과하다. 한국 노동자민중은 지난 2020년 4.15 총선에서 그것을 명확히 확인했다. 진보적 군소정당의 의회 진출을 위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지만, 거대 양당은 위성정당 방식으로 제도를 악용해 정치적 역동성을 왜곡했다. 비례대표 전용 위성정당은 거대 양당 독점 구도가 얼마나 견고한지, 또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이러한 연합정치는 구태의 반복을 넘어 최악의 퇴행 정치로 기록될 것이다. 위성정당 참여는 여전히 자유주의 정치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포획되는 방식이고, 결국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좌파정치세력이 의회에 진입하는 일은 어느 하나의 법률 개정으로 달성될 수 없다. 대중적 정치활동을 통해 지지를 확보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제도적으로 좌파의 접근을 차단하는 방해물이 겹겹이 쌓여 있다. 선거법과 함께 정당법, 정치자금법 등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비례대표제는 사회‧경제적 취약그룹의 조직화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물투표보다 정당투표 경향이 강해지기 마련인 비례대표제 환경에선 각 정당이 이념과 정책 기조를 선명하게 표방하고 그에 동조하는 집단을 자신들의 사회적 지지기반으로 유지‧관리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주요 부문이나 집단의 사회세력화 및 정치세력화를 직접 추진하게 된다. 요컨대,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는 사회‧경제적 균열 주체들의 사회세력화 및 정치세력화를 도와 결국 정당의 구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선거운동기간마다 폐단이 벌어지는 지역구 선거제를 폐지하거나, 혹은 선거운동기간을 정하지 말고 일상적으로 노동자민중과 소통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정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사실상의 금권선거를 야기하는 기탁금 제도를 폐지하고, 선거에서도 완전공영제를 실시해야 한다. 선거기탁금 제도는 1972년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도입됐는데, 국회의원에 입후보하는 사람은 일정 금액을 국가에 납부해야 후보로 등록할 수 있게 한 제도다.

 

무엇보다 정당법을 전면 개정해서 정당 등록을 간소화해야 한다. 현행 정당법에 따르면 정당의 설립 요건은 까다롭지만, 국가권력에 의한 정당 등록 취소는 쉽다. 이는 거대 보수정당의 기득권을 용인하는 것에 불과하며, 좌파정치세력의 정당운동을 원천봉쇄하는 악법이다. 정당 설립이 ‘신고제’인 나라에서 지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정당 등록을 취소시키는 규정은 사실상 정당 ‘허가제’나 다를 바 없으며, 군소정당에 차별을 가하는 독소조항이다.

 

지난 4.15 총선을 통해 분명해진 것이 있다. 바로 자유주의-보수 양당 독점 구조가 한국 정치의 핵심 적폐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4.15 총선처럼 양당 독점 구조를 강화하는 다당제 연합정치로는 진보정치, 아니 계급정치의 미래를 도모할 수 없다.

 

 

 

의회정치와 좌파정치의 변증법

 

좌파정치세력 일각에서는 의회정치의 한계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 선거무용론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좌파는 자본주의 위기가 갈수록 심화하는 가운데 피폐해지는 노동자민중의 일상과 구조적 불평등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대안을 제시해야 하며, 선거는 대중 앞에 그 정치적 대안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대중은 당장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문제를 법과 제도적 변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욕구를 갖는다. 그렇다면 좌파는 그 욕구가 ‘틀렸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제한적이나마 주기적으로 열리는 제도적 공간을 활용해 그 대중적 열망을 대변하는 동시에 체제 내에서의 한계를 폭로하며 변혁의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좌파정치세력의 의회정치 진입이 필요하다. 의회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민중이 직접 정치적 결정을 할 수 없기에 소수 권력자나 자본가계급의 이익이 국가 이익으로 대변된다는 점이다. 현재의 부르주아 정치는 소수 엘리트에 의한 정치권력 독점으로 귀결한다. 이는 노동자민중의 정치공간을 협소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부르주아 의회정치가 노동자민중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제 정치권력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기획과 전략이 필요하며, 앞서 언급했듯 지금까지 좌파정치세력의 진출을 차단했던 법‧제도의 전면적 개혁 역시 수반되어야 한다.

 

모든 정치세력은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 좌파정치세력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세계 각국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을 통해서 잘 드러나듯, 노동자민중이 권력의 주체가 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온전한 사회주의 건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민중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좌파정치세력의 자기-조직적인 기획과 정치가 필요하다.

 

한국 좌파정치세력에게 의회와 선거는 대통령 직선제 등 보통선거권 쟁취가 상징하는 민주화 국면이 열리면서 마주하게 된 대표적인 정치실천적 딜레마다. 체제 변혁은 지난한 과제이며 이 과정에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지만, 현실 제도정치에서 자신의 대변자를 찾지 못한 노동자민중이 염증과 소외감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실천 자체로부터 이탈하며 좌파정치세력이 설 자리가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에서 노동계급이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의회정치의 압제와 착취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의회정치 자체의 미숙함 때문에 이중적 고통을 받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좌파는 의회정치에 적극 개입하는 동시에 부르주아 지배로부터 해방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제도 선거라는 ‘차려진 판’에서 대중 앞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하고, 거꾸로 이를 활용해 부르주아 국가와 정치의 한계를 밝히며 체제 변혁의 담지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계급정당 건설과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을 노동자민중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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