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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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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럼프 이후의 미국과 세계


혼란한 선거

어정쩡한 결과

공격받는 사회주의


이주용┃기관지위원장



‘민주주의의 승리’? 

형식적 수준조차 미비


선거를 치르면 개표 한나절 만에 대개 당선자가 판가름 나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선거일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최종 결과가 불투명했던 미국 대선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차기 대통령직을 인수하게 된 바이든은 자신의 승리가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자화자찬했지만, 아주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총 유권자 수 기준 다수 득표자가 누구인지 명확해진 상황에서조차 당선자를 확정할 수 없는 미국의 선거 시스템이 ‘민주주의의 승리’를 자부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미국 인구가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니다. 세계적인 자유주의 언론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는 “지난해 인도 총선에서는 6억 표를 계산하는 데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번 미국 대선에서는 1억 4천만 표를 집계하는 데 며칠씩 걸리고 있다”며 비꼬듯 지적하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한 기술적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미국 대선에서 당선자 확정이 늦어지거나 혼란해지는 고질적인 제도적 배경에는 ‘다수 득표자라도 낙선할 수 있는’ 특유의 간선제가 자리 잡고 있다. 많이 알려져 있듯, 미국 대선은 직선제가 아니다. 주()별로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이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다. 선거인단 규모는 각 주의 인구에 따라 달라지는데, 가령 이번 대선에서 전체 선거인단 수는 538명이었고(이 가운데 과반인 270명을 얻으면 당선), 그중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55명)와 텍사스(38명), 플로리다(29명), 뉴욕(29명) 등의 주에 많은 선거인단이 배정됐다. 그런데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대다수는 ‘해당 주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표를 받은 후보가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을 몽땅 가져가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인구가 많은 몇몇 주에서 아주 근소하게라도 승리해 대규모 선거인단을 싹쓸이하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여러 주에서 크게 패배해도 전체 선거인단 수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즉, 전국적인 실제 득표수에서 밀리더라도 대통령에 당선할 수 있는 것인데, 당장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이렇게 백악관에 입성했다(2000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 역시 전국 득표수는 더 적었지만 대통령이 됐다).


트럼프가 선거 불복을 선언하며 한동안 난장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이렇듯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전국 득표수보다 주별 선거인단 확보가 관건이니,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몇몇 주에서 한 표라도 더 많이 얻어 선거인단을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은 유‧불리에 따라 어떤 주에서는 ‘모든 표를 개표하라’고 하고, 어떤 주에서는 ‘개표를 멈추라’고 압박하며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쏟아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 사회주의자들은 이번 대선 이후 ‘비민주적인 선거인단 제도(대통령 간선제) 자체를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선거인단 제도의 문제는 이뿐만 아닌데, 무엇보다 이 시스템이 노동계급 좌파 정당의 진입을 차단하고 보수 양당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중적 지지를 받아도 주()별 투표에서 한 표라도 밀리면 해당 주 선거인단을 모두 빼앗기니, 이른바 ‘사표(死票) 방지’ 이데올로기는 극에 달하고 제3 정당이 설 자리는 좁아진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노동계급 독자 정당이 선거에 출마해 여러 주에서 골고루 지지를 획득해도, 민주-공화 양당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과반 득표를 해내는 주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이 정당이 얻는 선거인단 수는 ‘0명’이다. 이런 실정이니, 바이든의 당선은 ‘민주주의의 승리’이기는커녕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제도적으로 제약하는 미국의 현실을 다시금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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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은 당선했으나, 

민주당은 패배했다


하지만 이런 제도적 문제의 해결(예컨대, 선거인단 제도의 폐지) 자체가 당장 미국 정치지형을 노동계급에 획기적으로 유리하도록 바꿀 것 같지는 않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면, 미국 사회주의자들도 그런 식의 장밋빛 전망을 내놓지는 않는다). 이번 대선은 트럼프가 상징하던 우익 포퓰리즘이 ‘일시적 일탈 현상’이 아님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현시점에서 트럼프가 확보한 선거인단 수는 232명으로 전체 선거인단의 43% 수준이지만, 실제 전국 투표에서는 거의 47%가 트럼프를 찍었다. 즉, 간선제가 아니라 직접 투표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보면,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은 그가 확보한 선거인단(이 대표하는) 비율보다 훨씬 더 높다. 트럼프는 지난 2016년 대선 때보다 1천만 표 이상을 더 끌어 모으며 7천 4백만 표를 얻었다.


이번 대선은 의회 선거(상원의원 1/3과 하원의원 전체를 새로 선출)와 동시에 열렸는데, 당초 미국 민주당은 대선 압승은 물론이고 상‧하원 모두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다(기존에 민주당은 하원에선 다수당이었지만, 총원 100명인 상원에서는 53:47로 공화당에 뒤진 상태였다). 하지만 민주당이 기대하던 이른바 ‘푸른 물결’(파란색은 민주당의 상징으로(공화당은 빨간색), 곧 대통령과 상‧하원 선거를 민주당이 싹쓸이할 것이라는 전망)은 산산조각났다. 대승을 거두리라 예상했던 대선에서는 트럼프와의 득표율 격차가 4%p에 그쳤고, 상원 탈환은 사실상 멀어졌으며(공화당이 이미 50석을 확보했고, 내년 1월 조지아주에서 2석을 놓고 결선투표가 진행되지만 전통적으로 공화당이 우세했던 이곳에서 민주당이 2석 모두 가져가야 다수당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기존 과반에서 더 많은 의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던 하원에서는 오히려 10석 정도를 공화당에 빼앗겼다.


코로나 대처 실패로 27만 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고 경제위기 속에 2천만 명 이상이 실업자로 내몰린 상황에서도, ‘정부여당 심판론’은 민주당이 희망했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도저히 트럼프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조차 선뜻 민주당에 표를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공화당 내에서도 트럼프와 친밀한 관계인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은 이번 선거에서 ‘반()트럼프’를 기치로 내건 민주당의 제1 표적이 되었음에도(<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민주당은 그레이엄을 낙선시키려는 데만 무려 1억 달러(약 1,100억 원) 이상의 기록적인 선거자금을 쏟아부었다), 14%p의 큰 격차로 민주당 후보를 따돌리고 여유롭게 4선에 성공했다. 게다가 히틀러의 휴양지를 방문하며 자신의 ‘버킷 리스트’였다고 말해 물의를 빚은 바 있는 매디슨 커손과 더불어, 극단적 우익 음모론(민주당을 ‘사탄숭배 집단’이라고 공격)을 신봉하는 마조리 그린 등 공화당 극우 인사들이 이번 선거에서 당선해 하원에 입성하게 됐다.


물론 이런 몇몇 사례를 곧바로 일반화해서 미국 노동계급이 대거 우익 포퓰리즘에 쏠렸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맑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가 이번 대선 결과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연간 소득 5만 달러(약 5천 5백만 원, 미국의 중위 평균소득) 이하 유권자(전체 유권자의 38%)들은 53:45의 비율로 바이든을 지지했으며… 미국 노동계급의 다수는 트럼프주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과반에는 못 미치더라도 미국 노동계급의 상당수가 트럼프를 찍은 것 역시 사실이며… 도시 지역에서 바이든 지지가 상당히 높았듯, 소규모 지역과 시골 지역에서는 많은 수가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언급했다. 한편, <CNN>이 집계한 출구조사에서는 대졸 미만 학력의 백인(조사 인원의 35%) 가운데 67%가 트럼프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마이클 로버츠 역시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에서 학위 소지자가 36%에 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화당의 앞날엔 긍정적인 소식”이라고 전했다. 2008년 대공황 직후부터 대규모 구조조정과 금융자본 살리기로 점철됐던 오바마 정부 8년을 경험한 백인 하층 노동대중에게, 민주당은 결코 ‘기꺼운 대안’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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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바이든 정권 인수위원회 홈페이지]



바이든: “근본적인 변화는 

없을 겁니다”


트럼프: “4년 후에 

뵙겠습니다”


이런 형국이니, <이코노미스트> 같은 자유주의 언론부터 <레프트 보이스 Left Voice> 등 사회주의 매체에 이르기까지 ‘트럼프는 패배했지만 트럼프주의는 남아 있다’고 공통으로 지적한다. 이렇듯 노동계급 대다수가 ‘우익 포퓰리스트’와 ‘전통적 신자유주의 엘리트’ 어느 한쪽을 전적으로 밀어주기보다 그 사이에서 분열되고 요동치는 상황은 한편으로는 노동계급의 독자적 이해를 대변하는 대안세력이 뿌리내리지 못한 데 따른 비극적 현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자들이 기존 보수 양당의 지배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잠재적 에너지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바이든 정부의 경로가 어느 정도 예견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독자적 정치 세력화가 실패하고 ‘민주당 내 개혁’이라는 노선을 유지할 경우, 4년 뒤 (트럼프든, 그의 가족이든, 다른 누구의 얼굴을 내세우든) 우익 포퓰리즘의 바람은 다시 불어 닥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작년 6월, 바이든은 뉴욕에서 자신을 후원하는 부호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을 악마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저는 당신들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본격적인 정권 인수 작업에 착수한 지금, 지배계급에 대한 바이든의 ‘약속’이 현실화할 조짐은 농후하다. 바이든은 정권 인수위원회와 주요 내각 구성원을 선임하면서 여성이나 유색인종 출신을 전진배치해 ‘정체성 정치’에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그 내면을 보면 그야말로 화려하다. 좌파 언론 <자코뱅 Jacobin>과 <레프트 보이스>에 따르면, 바이든 정부 내무장관 지명자 안토니 블링켄은 (바이든 본인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라크 전쟁 지지자였고, 인수위 노동부문 팀원으로 합류한 세스 해리스는 IT 자본가들을 위해 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법적 전략을 세우던 인물이었다. “기후위기 활동가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맡게 될 백악관 시민참여국 국장에는 화석연료산업 자본가들의 막대한 후원금을 받고 있던 하원의원 세드릭 리치먼드를 내정했다. 그 외에도 오바마 정부에서 가혹한 이민 단속과 추방을 진두지휘했던 세실리아 무뇨스를 비롯해, 애플과 페이스북 등 실리콘밸리 자본가들을 대변할 인사들 역시 인수위에 포함시켰다. 미국의 진보적 월간지 <인 디즈 타임스 In These Times>는 바이든 인수위 국방부문 팀원의 1/3이 군수산업 자본가들의 후원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동시에, 민주당 주류는 당내 좌익에 대한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그 표적은 지금까지 ‘민주당 내 개혁’을 표방하며 급진적 요구를 내걸었던 버니 샌더스와 DSA(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 그룹이다.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민주당 의원들을 포함한 주류 세력은 (앞서 지적했듯)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예상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심지어 하원 의석 일부를 공화당에 빼앗긴 이유가 ‘당이 좌경화하는 이미지를 보였기 때문’이라며, 다분히 격앙된 어조로 “다시는 ‘경찰 해체’[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인종차별적 폭력 집단 경찰을 해체하라’는 요구가 대중적 시위의 구호로 자리 잡은 바 있음]라거나 ‘사회주의’ 같은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보수적인 민주당 후보들이 낙선한 반면,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AOC)와 일한 오마르 등 DSA가 지원한 좌파 후보들이 (민주당 소속이라는 한계는 있어도) 재선하거나 새로 당선하며 급진적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지만, AOC가 “우리는 적이 아니다”라고 호소한 것과 달리 민주당 주류는 사회주의자나 급진 좌파를 명확히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본가의 하수인들과 제국주의자들로 득시글대는 바이든 ‘신’정부에서, 이 지배자들을 적으로 대면하지 않고선 사회주의자들이 (제도정치권에 분노하는) 하층 노동대중을 세력화할 길은 요원하다. 선거를 마친 뒤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이 칼끝을 좌파에게 돌리는 지금, 독자적인 사회주의 정당의 건설이 다시 한번 중대한 과제로 제기된다. 4년 뒤, (오바마 정부가 그랬듯) 바이든 정부가 토대를 제공할 우익 포퓰리즘의 바람 앞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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