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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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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주의와 의회주의,

사회주의를 

‘불가능한 꿈’으로 미뤄놓다


-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2

: 수정주의 논쟁 2


이재유┃서울



지난 호 연재에서는 19세기 후반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혁명에 관한 맑스주의의 핵심 원칙들을 부정하거나 폐기했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얘기했다(<변혁정치> 116호(2020년 11월 1일 자) 기사 “이론의 폐기와 개량주의로 가는 길” 참고). 이번 호에서는 바로 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유물론과 변증법에 대한 부정)가 왜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명백한 분리로 이어지는지, 노동가치론을 어떻게 부정하는지, 그리고 (수정주의 논쟁 초기에 베른슈타인과 대립했던) 카우츠키의 입장과 베른슈타인의 입장이 어떻게 모두 개량주의로 나아가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분리

: 자본의 이데올로기


먼저 유물론과 변증법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부정은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명백한 분리를 보여준다. 베른슈타인에게 ‘토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 즉 완결된 하나의 이론 체계로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이며, ‘상부구조’는 이 현실 너머에 있는 완결된 하나의 체계로서 이해된다(이는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이상 그 자체)와 ‘현실계’를 분리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현실계’는 결코 ‘이데아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이로써 베른슈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서의 사회주의는 ‘상부구조’에 속하는 것이며, ‘사실’의 성격을 넘어서는 ‘도덕‧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고, 그리하여 ‘유토피아적인 이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베른슈타인에게 ‘토대’는 여전히 ‘물질적인 것’에 한정된다. 이는 무척 모순적인 것으로, 베른슈타인이 그토록 비판했던 카우츠키의 ‘생산력 우선주의’와 직결된다(물질적 생산력이 발전하면 생산관계와 모순을 일으켜 자본주의 위기를 초래하므로, 인간의 의식적 실천보다 생산력 발전이 역사의 전진에 더 중요하다고 보는 기계적 유물론의 시각). 이 ‘생산력 우선주의’는 곧 ‘물질적’ 생산력 우선주의로서, 물질적인 것(상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힘이 된다. 물질적인 것을 생산하는 힘은 곧 자본을 더 많이 생산하는 힘과 연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하는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생산력 발전이 역사 진보의 원동력이라면 자본이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시도하는 행위를 지지할 위험을 갖게 되는 것).


이처럼 물질적 생산력 우선주의는 자본의 생산력 증대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개량주의로 연결된다. 자본주의가 사회민주주의를 비롯한 모든 개량주의를 체제 내화할 수 있는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된다(이는 또한 ‘혁명’을 ‘체제 내 개혁’으로 대체하는 의회주의와도 직결되는데, 나중에 카우츠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수(노동계급)의 지배’라고 주장하면서 의회주의를 무척 강조했다는 것 또한 모순적이라 하겠다). 베른슈타인처럼 토대와 상부구조를 분리하고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은 결국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환원주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변혁적 실천

: ‘총체적’이고 ‘유물론적’인 

인간의 생산


베른슈타인과는 달리, 맑스에게 토대와 상부구조는 모두 변혁적인 ‘실천’으로 연결돼 있다. 이때 ‘변혁적 실천’은 데카르트식의 ‘코기토(Cogito: 생각하는 나)’나 로빈슨 크루소 같은 추상적 욕망을 가진 개별화된 인간으로부터 구체적 욕구를 가진 사회적 인간으로의 ‘인간 생산’이다. 전자의 인간은 자신의 구체적 내용이 없기 때문에 그의 욕망 역시 구체적이고 유한한 게 아니라 비()구체적이고 무한하다. 이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라는 말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전자의 인간은 구체적 내용을 다시 추상적인 무언가로 채우려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자본이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신(God)이며, 대중문화 측면에서는 아이돌(idol)이고, 정치적 측면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이다.


반면, 후자의 인간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구체적 내용을 갖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가 처한 사회적 관계에 따른 욕구의 충족과 직결되며, 그 욕구 역시 자기 자신만을 위한 배타적 욕망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의 연대’를 위한 보편적이고 사회적이며 총체적인 욕구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의 충족은 ‘최대 다수’만을 위한 게 아니라, 누구도 이 충족에서 배제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맑스의 ‘변혁적 실천’은 ‘생산’인데, 베른슈타인처럼 토대와 상부구조가 분리된 ‘물질적(상품 또는 자본)’ 생산이 아니라, 이 둘이 결합한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의 생산이다. 이 인간이 ‘총체적’이며 ‘유물론적’인 인간이다.



베른슈타인의 

노동가치론 부정


한편, 베른슈타인은 노동가치론도 부정한다. 노동가치론에서의 가치와 잉여가치는 베른슈타인에겐 하나의 ‘가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베른슈타인에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 현실은 ‘파악되고 규정될 수 없는, 그래서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치, 또는 잉여가치는 현실 전체를 설명할 수 없는 ‘논리적 가상’일 따름이다. 이와 관련해서 베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자본주의에서 ‘현실적으로’ 교환은 가치가 아니라 생산 가격으로 이뤄진다(가치≠가격). ② 잉여가치 역시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이윤에 의해서다(잉여가치≠이윤).


결론적으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필연적으로 개량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베른슈타인은 1899년에 나온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가 현실적으로 낡아 버린 구호에서 벗어날 용기를 갖고 현재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즉 민주적-사회주의적 개량 정당이 되려 한다면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은 현재보다 월등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개량’은 물질적 변화에 대한 수동적인 반영 또는 반응으로서, 경험론자인 베른슈타인의 논지대로라면 어떤 목적론적인 진보성을 띠는 게 아니다. 즉, ‘변화’인 것은 맞지만 그 변화가 진보적인 것이라 단언할 순 없으며, ‘개량 이전보다 이후가 더 발전된 것’이라는 전제는 부정된다. 결국 개량은 ‘조삼모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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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 [사진: Left Voice]



카우츠키의 입장

: 결정론


한편, 카우츠키를 비롯한 독일 사회민주당 주류는 결정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결정론에 따르면, 당대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조건이 무르익지 않아서’다. 즉, 자연법칙과 같은 역사적 법칙에 따라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으로, ‘혁명이 일어날 만큼 생산력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해가 떠서 지려면 반드시 낮을 거쳐 저녁이 돼야 하듯, 생산력 발전으로 부르주아 사회가 충분히 발전하면서 동시에 모순으로 가득 차야만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에 상응하는(또는 토대의 발전을 가감 없이 반영하는) 상부구조인 정치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해야만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회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프롤레타리아에 속하지 않던 소()부르주아지(자영업자, 중소 농민 등)가 불황과 공황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동시에 모순이 심화할수록) 절대다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 절대다수를 통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서도 언급했지만)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회를 통한 프롤레타리아 다수의 지배’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베른슈타인 같은 의회주의‧개량주의 경향을 노정한 것이고, 카우츠키 자신이 비판했던 베른슈타인의 경험론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후일 레닌은 카우츠키의 이러한 주장을 격렬히 비판하게 된다.



카우츠키의 계급

: 경제적 이익에 따른 

유동적인 이합집산의 형태


카우츠키의 경험주의적 성향은 ‘계급’에 대한 규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사회적 관계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이란 고정된 지위로 고착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유동적이다. 따라서 신분에 따른 선거권은 이미 여기서 배제된다. 그러나 신분으로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계급이란 것은 형태를 갖추지 않은 유동적인 대중을 이루고 있어서 그 경계를 엄격하게 구분짓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계급이란 경제적 범주이지 법률적인 범주가 아니고 어떤 계급에 속하느냐 하는 것도 지속적으로 변동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말했듯이 다수파의 지배를 의미한다. 그러나 다수파는 계속 변화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는 어떤 정권도 영속적으로 집권할 수 없다.” *


이렇듯 경험주의에 기반한 계급 규정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카우츠키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경제적 상태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의 형태로 존재할 뿐, 본질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럴 때 다소 형식적인 ‘다수결의 원칙’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민주주의’가 중요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민주주의’가 소수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어떤 계급이 지배적일 수는 있지만 그 계급이 곧바로 통치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통치를 위한 조직은 정당이다. 정당은 일차적으로 어떤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곧바로 하나의 계급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통치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것이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며 누구나 소수파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소수파 보호원칙은 민주주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그것은 다수파 지배원칙에 비해서 결코 덜 중요한 원칙이 아니다.” **


그런데 이들의 경험론에서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곧 의회정당, 제도권 정당을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뜻한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소수파를 무시할 수밖에 없거나, 아니면 다수파의 의견에 동조하는 만큼만, 즉 다수파가 수용할 수 있는 만큼만 소수파를 보호한다. 부르주아 정당 사이에서 다수파와 소수파의 관계는 권력을 잡은 다수파와 권력을 잡지 못한 소수파의 갈등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를 보호하는 공생 관계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부르주아 정당과 어떠한 공유점도 없기 때문에 보호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정당이 부르주아 법에 의거한 조건을 갖추지 못해 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할 경우, 사회주의 정당은 소수파(보호받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공산주의 선언』의 첫머리에 나오듯 ‘유령’으로서 배척당하는 대상일 뿐이다. ‘소수파’가 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부르주아 정당’으로서의 ‘당’으로 결집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칼 카우츠키(강신준 옮김), 『프롤레타리아 독재』, 한길사, 2006, 76/78쪽.

** 카우츠키, 같은 책, 79~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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