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10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7.01 18:48

이 시대의 ‘조국 방위’와 맑시즘


레닌전집 읽기 모임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

그곳은 어디인가

전선이다 감옥이다 무덤이다

도대체

동포의 살해 앞에서 저항하지 않고

누가 있어 한낮의 태양 아래서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있어 한밤의 잠자리에서 편할 수 있단 말인가

동지여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싸우지 않고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옹호하며

무기를 들지 않는다면

혁명의 새벽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 김남주, <살아남은 자들이 있어야 할 곳>



시류를 거슬러


1916년 7월, 1차 세계대전의 복판에서 레닌은 <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를 집필했다. 그 직전에 쓴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레닌은 제국주의를 ‘사멸하는 자본주의’이자,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야’라고 분석했다. <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는 이를 내용적으로 심화하는 강령‧전술상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노동계급 운동 내에 만연한 기회주의와 ‘시류를 거슬러’ 투쟁하는 것이었다. 기회주의는 이른바 ‘좌익 유아적 경향’, ‘조국방위파’, ‘반전평화파’ 등의 조류로 나타났다. 이에 맞서 투쟁한 레닌의 핵심주장은 민주주의 사수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즉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뗄 수 없이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109_41_수정.jpg




오늘날의 ‘막대 구부리기’


레닌의 저작 대부분이 그렇듯, 이 책 역시 급변하는 정세와 그에 입각한 실천을 긴밀히 다룬다. 기회주의가 왜곡한 강령‧전술 문제를 ‘한쪽 극단에서’ 다른 방향으로 굽히는 이른바 ‘막대 구부리기’를 구사했던 레닌은 제국주의 반대 투쟁과 자본주의 반대 투쟁의 연관을 살폈다. 핵심은 정치적 원칙과 전략‧전술, 이에 따른 유연성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전쟁이 운동을 압도하던 당시,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투쟁을 경제주의적으로 사고했기에 레닌은 이를 두고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라 비판했다. 경제주의는 19~20세기 전환기에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나타났는데, 노동자운동의 임무를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등 경제투쟁으로 제한했으며, 정치투쟁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차 대전 시기에는 새로운 경제주의가 등장했다. 이 경향은 ‘제국주의는 승리했다, 따라서 민족자결권 같은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에 신경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다.


당시 키엡스키를 비롯한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하에서는 민족 자결을 실현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하에서는 민족 자결 요구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당시 민족해방운동의 흐름 가운데 일부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향이 득세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개입해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을 폭로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모든 민족국가에서 동일한 발전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 혁명이 일시에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것 역시 불가능한데, 이를 바라는 것은 결국 혁명을 포기하거나 대기주의‧패배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 지적했다.


“주어진 시대에 있을 수 있는 모든 다양한 현상들의 총체로부터 하나의 구체적 현상을 구별해낼 능력… 하나의 시대가 시대로 불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 다종다양한 현상들과 전쟁들의 총합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에 관한 일반적 문구들에 의존함으로써 이 구체적 문제들을 무시하려는 것은 ‘시대’ 개념 자체를 남용하는 것이다.”


- “새로운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이해”, <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159쪽


피억압민족의 자결권과 민족해방투쟁의 의미를 부정했던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라는 좌익 기회주의는 의도와 관계없이 제국주의 국가의 민족억압을 묵인하고 방조하는 셈이기에,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우익 기회주의의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 민족자결권을 주장하는 것은 민족의 분리를 조장하는 게 아니다. 민족자결권을 보장해야 민족들의 자유로운 제휴와 융합이 가능하다. 따라서 ‘제국주의 옹호’와 ‘피억압민족의 민족자결권 거부’라는 두 편향을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는 사회주의 혁명 전망을 상실한 채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 갇힌 협소한 부문주의‧개량주의 운동이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임금인상, 복지 확대, 고용안정, 정규직화 등 노동자의 당면 요구를 위한 운동에만 몰두하면서 노동자계급이 사회와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는 조합주의 운동이 있다. 좌우 기회주의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던 레닌의 문제의식을 오늘날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까? 협소한 부문주의‧개량주의와 조합주의 모두에 대한 비판적 극복으로 사회주의 현장 정치활동의 정형을 창출해야 한다.


“우리가 몽골인, 페르시아인, 이집트인과 그 밖의 모든 억압받고 불평등한 관계에 있는 민족들에 대해 예외 없이 분리의 자유를 요구할 때 그것은 우리가 분리에 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강제적 제휴와는 구별되는 자유로운 자발적 제휴와 융합을 지지한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모든 피억압 민족의 분리의 자유를 인정, 옹호하지 않는 억압 민족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민주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 “키엡스키에 의해 제기되고 왜곡된 그 밖의 정치적 문제들”, 같은 책 214~219쪽



이 시대의 ‘조국 방위’


우리 역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공세는 국경과 인종과 계급을 갈라치며 세계적으로 몰아치고 있다. 억압 국가와 피억압 국가의 노동자계급은 각개 전투로 격파당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언제까지나 ‘피억압국가’의 노동자민중이라는 사고를 고수할 수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미국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 운동이 그 잠재력‧파급력에 걸맞게 남한 사회에서 더 큰 도화선에 불을 댕기는 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은 노동자운동과 사회주의 정치의 토대가 허약함을 반증한다. 이미 수없이 죽어 나가는 이주노동자, 차별받고 추방당하고 거부당하는 난민 동지들에게 새로운 ‘억압국가’로 떠오른 남한의 현실은 어떠한가?


“제국주의 대국 간의…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러한 전쟁에서 ‘조국 방위’는 기만이고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다. 피억압 민족이 제국주의 국가, 즉 억압 국가에 대항하는 전쟁은… 오늘날에도 가능하다. 억압 국가에 대항하여 피억압 민족이 수행하는 전쟁에서 ‘조국 방위’는 기만이 아니다.… 민족자결은 완전한 민족해방과… 병합에 반대하는 투쟁과 동일한 것이며, 사회주의자는 봉기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어떠하든 그러한 투쟁을 거부할 수 없다.… 사회배외주의자들은 이 전쟁을 민족적인 전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자결을 내세운다. 그들과 싸우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이 있다. 이 전쟁이 민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강도들 가운데 어느 강도가 더 많은 민족들을 억압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치러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 “전쟁과 조국 방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태도”, 같은 책 154~156쪽


우리의 조건과 현실에서, 이주노동자 운동을 사고하는 기존 노동조합 운동의 실리주의‧관료주의를 본다. 코로나를 빌미로 자본가와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노사 협조주의자들을 본다. 이것이 이 시대의 ‘조국 방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계급 적대와 피아식별을 목적의식적으로 흐리려는 기회주의 공세에 맞서, 피억압 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의 실천적 임무 역시 각인된다.


109_43.jpg




‘트로이목마’ 직시하기


노동조합운동 주류의 한계와 기회주의를 목도하는 동시에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위해 온 삶을 걸고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들의 절박함을 본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은 문재인 정권과 자본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임금인상분 반납’을 먼저 운운하며 양보하는 자세를 보였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이남신과 민주노총 전 사무부총장 한석호는 ‘연대임금, 고통분담, 정규직 임금동결’ 등이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노동계의 선제적 양보 방안이라 주장했다.


이들 모두 위기 극복을 핑계 삼아 정규직‧비정규직을 갈라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형국이다. 경제위기, 전쟁위기 때마다 자본가계급은 호시탐탐 정리해고‧임금삭감 등 노동개악을 노린다. 이 상황에서 ‘투쟁보다 타협’이라는 식의 태도는 자본가계급의 트로이목마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단위 사업장 임단협에서는 자본가들이 벌써 ‘민주노총이 먼저 임금동결도 주장하는데, 해당 노조의 (인상) 요구는 과하다’라는 류의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 시대의 ‘조국 방위’와 자본가계급이 앞세운 ‘트로이목마’를 직시할 때, 진정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코로나 전쟁을, 자본주의 체제로 인한 경제 전쟁을, 제국주의적 침탈로 인한 민족해방 전쟁을 계급투쟁으로 돌파할 수 있다. 일상이 전쟁인 평범한 노동자계급의 폭발적 잠재력을 분명한 계급적 분노로 풀어낼 수 있다. 당면 정세와 체제 위기 속에서 맑시즘을 희화하는 기회주의와의 투쟁은 곧 노동자계급을 혁명 주체로 세우고, 올바른 피아식별을 위해 ‘혁명이냐, 개량이냐’의 근본문제를 다시금 엄중하게 되묻는 사회주의자의 필수 역할이다.



[함께 읽을 레닌의 글]

- 레닌전집 64권(“맑시즘의 희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양효식 역, 아고라, 2018.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