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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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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7.0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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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wikipedia



미국 사회는 왜 다시 불타오르는가?


H미국 거주



* 편집자: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살해 사건을 계기로 미국 곳곳에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어떻게 계급 문제와 연관돼 있는지, 인종차별에 근거한 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 그리고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이 어떻게 사회주의‧좌파 운동과 결합해왔는지 살펴보기 위해,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H 동지에게 기고를 요청해 싣는다.


미국의 인종분리


1886년 링컨 대통령은 흑인 노예의 해방을 선언했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사라지기는커녕, 훨씬 더 교묘한 방법으로 미국 사회에 파고들었다. 노예 해방 선언 이후로도 100여 년간 미국 흑인들은 백인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도, 같은 식당에서 식사할 수도, 심지어는 같은 버스에 탈 수도 없었다. 투표권은 사실상 박탈당했고, 흑인들은 물리적 폭력에 상시로 노출돼 있었다. 이것이 악명 높은 미국의 “짐 크로(Jim Crow)”, 곧 흑백 인종분리 제도다.


“짐 크로”는 1954년 연방대법원에 의해 폐지됐는데, 이를 기점으로 인종분리를 실질적으로 철폐하기 위한 광범위한 대중운동이 시작됐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의 로자 파크스(Rosa Parks),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과 말콤 엑스(Malcolm X)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흑인 민권활동가로서, 민권운동은 여러 활동가들의 헌신과 흑인 대중의 지지에 힘입어 1970년대까지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민권운동의 열기는 사그라들었다. 인종차별이 종식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인종차별은 여전히 미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지만, 민권운동은 이전과 같은 활기를 되찾지 못했다. 이는 여러 미국 학자들에게 의문거리를 던져주었다. 왜 민권운동은 활기를 잃어버렸는가? 왜 인종차별이 여전히 심각한데도 흑인들은 다시 들고일어나지 않는가? 왜 미국 사회는 더 이상 불타오르지 않는가?


학자들이 찾아낸 대답은 ‘차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미국 사회에 파고들어 흑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흑인의 빈곤을 흑인의 책임으로 전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더 이상 법‧제도적 방식이 아니라, 경제‧사회‧문화적 차원으로 확대돼 미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가령, 교사들은 흑인 아동을 열심히 교육하지 않는다. 애당초 흑인을 ‘가난하고, 게으르고, 무식하고, 폭력적’이라 여기면서 이들이 열심히 공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흑인 아동이 열심히 공부해도,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나 대가는 돌아오지 않는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한 흑인 아동은 더 이상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아무리 공부해봤자 희망찬 미래가 그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대학까지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양질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확률은 동기들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괜찮은 동네’에 살면서, ‘좋은 학교’에 자녀를 보낼 수 있는 가능성도 대단히 적다. 백인 중산층이 사는 동네는 흑인 입주민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흑인이 ‘게으르고, 무식하고, 폭력적이고, 멍청할 것’이라는 편견은 17세기 미 대륙에 영국인이 발을 디디기 전부터 만들어져 지금까지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 인종차별적 편견 속에서 사회‧경제‧문화적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은 제도화되고, 흑인은 가난 속으로 내몰렸다. 일단 ‘법적인 차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는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평등의 가면 속에서 흑인이 빈곤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는 은폐되고, 모든 책임은 흑인 개인에게 전가된다.


사회‧경제적 계급의 사다리에서 최하층으로 내몰린 흑인들은 미국 사회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가장 손쉽게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2020년 코로나와 함께 더욱 심화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가장 큰 피해자는 흑인들이다. 기업들이 제일 먼저 해고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고,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단이 흑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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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가 사건 발생 지역인 미니애폴리스에서 벌어지고 있다. 피켓에는 이번 시위의 대표 문구 중 하나인 '숨을 쉴 수 없다'가 적혀 있다. [사진: wikipedia]



인종차별과 폭력의 정치학


‘왜 미국 사회가 불타오르지 않느냐’고 미국의 학자들이 자문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지금 미국 사회는 다시 불타오르고 있다. 뉴욕 등 대도시만이 아니라, 조그만 소도시에서까지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종 차별 폐지’를 외치고 ‘흑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고 외친다.


미국 사회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 계기는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지난 5월 25일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미국 흑인 공동체에 누적된 분노에 불을 지른 것은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이 결코 우발적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흑인에 대한 폭력은 미국 역사와 함께 지속했고, 미국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


흑인에 대한 폭력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마 흰 두건과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횃불을 든 “KKK단”일 것이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린치는 소수 비밀 결사가 밤중에 몰래 자행하는 폭력의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백인 공동체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남부에서 가장 빈번했지만, 북부와 서부 곳곳에서도 흑인에 대한 린치가 이뤄졌다.


린치는 흑인들이 “짐 크로”라는 백인 우월주의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들었다. 폭력으로 흑인들을 침묵시키고, 백인 우위의 불평등 체제에 감히 반기를 들 생각조차 못 하게 한 것이다. 흑인이 백인 아동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 것, 흑인 여성이 백인 남성의 성폭행에 저항하는 것,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바라보는 것, 심지어는 흑인이 투표하러 가는 것조차 그들을 린치 위협에 노출시키는 행위였다.


린치는 196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법적으로 금지됐으나, 인종차별의 양상이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린치 역시 개인적인 차원으로 파고들었다. 특히 ‘흑인은 폭력적이고 위협적’이라는 편견은 흑인에 대한 폭력을 쉽게 정당화했다. 국가권력 역시 흑인에 대한 폭력과 살인을 옹호한다. 조지아에서 어느 백인 부자가 조깅하던 흑인 남성을 살해하고도 검사가 그를 기소하지 않은 게 고작 올해 3월에 벌어진 일이다.


특히 경찰은 사법 체계의 말단에서 대중과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사법 체계 전반에 만연한 인종차별은 경찰의 행위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서 그를 살해한 경찰은 ‘3급 살인’, 즉 ‘과실치사’로 기소됐다. 경찰이 시민, 특히 흑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더 나아가 그를 살해하더라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면책이나 다름없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후속 대처는 사법 권력, 나아가 미국의 국가권력 자체가 흑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을 묵인하고 직간접적으로 협력해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시 불타오르는 미국 사회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민권운동은 활기를 되찾았고, 미국의 좌파운동 세력 역시 이 열기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미국의 좌파운동과 민권운동 간의 관계는 깊고 긴밀하다. 1920년대에 레닌은 흑인 문제에 연대하지 않던 미국공산당을 비판한 바 있는데, 이후 미국공산당을 위시한 좌파 세력은 민권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어 왔다. 예컨대 1930년대에 민권운동 의제를 지지한 민간 조직은 미국공산당이 유일했으며, 미국 최대 민권운동 조직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이하 ‘NAACP’)”에서도 좌파 세력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비록 1950년대부터 매카시즘(반공주의 광풍)으로 인해 민권운동에서 사회주의 계열 활동가들이 고립되고 NAACP에서도 좌파 활동가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으나, 이들은 민권운동에 끊임없이 관여하면서 인종차별 피해자들과 연대했다. 특히 “민권회의(Civil Rights Congress, CRC)”는 대표적인 좌파 민권단체로서, 규모는 작으나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했다.


좌파운동과 민권운동 간의 관계가 다시 긴밀해진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다. 남부에서 인종 분리 폐지 캠페인을 주도한 민권운동조직 “인종평등회의(Congress for Racial Equality, CORE)”, 1960년대 민권운동을 주도한 흑인 학생 조직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 등은 상대적으로 매카시즘의 공포에서 자유로웠고, 좌파 활동가들은 이 조직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좌파 활동가들은 인종차별이 사회‧경제적으로 구조화되는 방식을 지적하며, 흑인의 빈곤 문제가 민권운동의 의제로 포함되는 것에 기여했다.


안타깝게도, 앞서 말했듯 1970년대 후반 민권운동의 열기가 식으면서 좌파운동과 민권운동 간의 연계가 도드라지는 일은 줄었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올해 민권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좌파세력 역시 저항 운동에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다.


6월 말 현재 시점에 이르러 기득권 세력은 저항운동이 ‘폭력시위로 변질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붓고 있다. 한편 연말에 치러질 선거로 저항운동의 열기가 수렴되는 경향이 나타나, 트럼프에 대한 비난과 투표를 통한 정권 교체로 의제가 모이는 추세다. 특히 미국에서는 11월 대선에 앞서 여러 차례 예비선거가 치러지기 때문에, 더더욱 선거에 관심이 집중되기 쉽다. 그러나 이 문제는 선거와 정권 교체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인종차별은 미국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정권 교체가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이미 과거의 사례들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를 넘어선, 현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제출돼야 할 시점이다.



*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1955년,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인종에 따라 버스 좌석을 분리하던 법령에 항의해 로자 파크스 등이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고 버티다 체포되자, 흑인들이 인종차별적인 버스 이용을 거부하며 벌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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