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미국을 뒤흔든 임대료 파업

우리에게 필요한 ‘행동하는 세입자’들


고근형┃서울



이른바 “임대료 파업(rent strike: 렌트 스트라이크)”이 벌어졌다. 코로나 사태 한복판에서, 미국의 세입자들이 임대료 납부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5월 1일 기준 뉴욕에서 1만 2천 명, 로스앤젤레스에서 8천 명의 세입자가 임대료 파업에 참여한다고 선언했다. 거센 파업 물결에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90일간 강제퇴거 금지 법안’을 제시했지만, 성난 세입자들을 달래기엔 역부족이다. 이 파업은 ‘착한 임대인 운동’을 독려하는 현수막이 골목을 뒤덮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어쩌다가 미국 세입자들이 임대료 파업에 나섰는지, 한국에서도 이처럼 행동하는 세입자들이 등장할 수 있을지 살펴보자.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


“임대료를 내기 싫은 게 아니라, 낼 수가 없어서 파업합니다.” 미국 민주사회주의자 그룹DSA 출신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가 한 말이다. 정말 그렇다.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코로나19가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올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미국에서 발생한 실업자는 3,860만 명, 4월 현재 실업률은 14.7%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더 놀라운 건 다가오는 5~6월 실업률이 25%로 예상된다는 점이다(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말이다). 25%면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최고 실업률이다. 불과 수개월 전까지 실업률 3%대를 유지하며 ‘완전고용’을 자랑했던 걸 떠올리면 그야말로 대격변이다. 종전의 3%대 실업률조차 저임금-불안정 일자리 양산으로 간신히 유지했던 수치다. 즉, 미국 민중의 삶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절대 풍요롭지 않았으며, 이제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당연한 이야기겠으나, 해고된 실업자 다수는 세입자였다. 그들이 직장을 잃었으니, 당연히 임대료 또한 낼 수가 없다. 오카시오 의원의 말이 세입자들의 현실을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임대료 파업이 성공할 수는 없다. 한국의 세입자들이라고 돈이 많아서 임대료 파업을 안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벌써 수년 전부터, 미국 세입자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어왔다. 당장 뉴욕주에서 “모두를 위한 주거 정의(Housing Justice For All)” 운동을 주도하는 단체는 70개에 달하는 세입자‧홈리스 조직들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2017년부터 ‘세입자들의 집단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 조직을 결성했으며, 그간 축적한 역량을 바탕으로 이번에 뉴욕에서만 1만 명이 넘는 임대료 파업 참가를 조직했다. 버니 샌더스, 오카시오 코르테즈를 비롯한 미국 민주사회주의자 그룹도 힘을 보탰다. 그 결과 이번 임대료 파업이 과거 대공황 시기 할렘가 흑인들의 파업 규모를 갱신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다.


더구나 이들은 ‘임대료 납부 중단’만을 제기하는 게 아니다. “모두를 위한 주거 정의” 운동은 △다주택자‧대토지 소유자에 대한 세금 인상 △모든 인민에게 안전하고 저렴한 임대주택 보장 △기업의 주택시장 개입 금지 및 사회주택(공공임대주택) 투자 확대를 주요 요구로 걸고 있다. 물론 이것이 그 자체로 토지 국‧공유화나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107_38.jpeg

△ 임대료 파업에 연대를 촉구하는 선전물. '(임대료를) 낼 수도 없고, 내지도 않겠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출처: Puget Sound Tenants Union(워싱턴주 북서부 세입자 연합)]



‘착한 임대인’을 대신할 ‘행동하는 세입자’가 온다


다시 한국의 상황으로 눈을 돌려보자. 코로나19로 인한 비정규직과 소상공인의 피해가 불어나는 가운데, 신규 채용은커녕 기존 일자리도 하루가 다르게 줄고 있다. 그 와중에 국민 절반이 무주택자고, 소상공인 절대다수가 임대료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너무 잠잠하다. 임차인들의 불만과 고통이 드러나기도 전에, ‘착한 임대인’ 운동이 여론을 잠식했다. 물론 ‘착한 임대인’ 운동은 세입자 구제책이 될 수 없다. 건물주가 언제까지고 임대료를 인하할 순 없으며, 정부는 임대료 인하분을 일정 기간 후 상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어쩌면 ‘착한 임대인’ 운동은 가까운 미래에 더 큰 부메랑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낙담할 필요는 없다. 미국의 임대료 파업에서 보듯이, 우리에게도 ‘행동하는 세입자’들이 있다면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 ‘착한 임대인’에 가려진 세입자들의 고통과 불만을 폭로하고, 세입자들을 조직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이를테면 코로나19 이후 세입자들의 평균 소득 변화와 임대료 변화를 비교하는 등의 방법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이 밀집한 고시원 등 비주택시설 세입자들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빨리 가시화해야 한다. ‘착한 임대인’의 허상과 세입자들의 긴박함을 여론화한다면, 빼앗긴 고지를 되찾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세입자들을 조직하고, 임대료 면제와 토지 불로소득 환수, 모든 세입자의 공공주택 입주 보장 등을 요구해야 한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던가. 사회변혁노동자당은 주택 문제가 가장 심각한 서울시에서부터 세입자 조직에 착수하기로 했다.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 세입자 모임()”과 같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비주택 세입자들을 주요 대상으로 보고 있다. 뉴욕에서와 같은 거대한 흐름을 곧바로 형성하긴 어렵겠지만, 사회주의 운동이 질적으로 달라질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당원들만의 힘으로는 어려울 수 있다. 코로나19의 최대 피해자, 바로 세입자 당신의 움직임이 필요한 시기다.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