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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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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1.16 20:19

진보의 재구성


김태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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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11시 법무법인 지평에서 이 로펌의 김지형 대표변호사가 삼성재벌 준법감시위원회 출범을 발표했다. 앞서 대법원이 이재용의 국정농단 뇌물죄를 확정하여 고법으로 돌려보냈으나, 파기환송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는 이례적으로 삼성에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를 주문하는 등 이재용 불구속 구실을 만든다고 의심받아 왔다.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 삼성재벌 준법감시위원회는 이재용 구속을 피하기 위한 도구임이 분명하다. 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변호사는 이재용과의 독대 결과를 들먹이며 애써 부인했지만, 그의 이재용 보호 의지를 확인시켜주었을 뿐이다. 이런 판단에는 역사적 맥락도 있다. 2009년에 대법원 2부 주심 판사였던 그는 에버랜드 전환사채 무죄판결로 삼성재벌 3대 세습의 물꼬를 터준 바 있다. 그는 이제 국정농단 범죄자가 된 이재용의 구속을 막아 삼성재벌 3대 세습을 완성시키는 공신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재벌 장학생들이 우글거리는 한국 법조계의 한 인사가 삼성을 옹호하는 것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김지형 변호사의 경우는 새삼스러운 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2014년 삼성 백혈병 피해보상 조정위원장, 2016년 구의역 사고 진상조사위원장, 2019년 김용균 사고 진상조사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장,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원장, 현대제철 안전·환경자문위원장…. 이런 이력으로 인해 그는 한국 법조계의 대표적 진보 아이콘으로 지칭되고 있다. 삼성재벌 준법감시위원회는 한국 법조계의 대표적 진보인사가 맡았기 때문에 믿을만한 것으로 선전되었다. 언론들은 경자년 벽두부터 준법감시위원장 내정자 김지형의 이름과 함께 삼성재벌이 윤리영경시대를 열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그는 진보적 활동을 왕성하게 한 바로 그 시기에 또 다른 이력을 쌓았다. 2014년 유성기업 노조파괴 사측 변호사, 2017년 기아자동차 불법파견 사측 변호사, 2018년 현대위아 불법파견 사측 변호사…. 그렇다면 같은 시기에 그가 쌓은 이율배반적 이력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김지형은 법조인이다. 법조인의 주무기는 판결과 변론이다. 그는 삼성, 현대기아차 등 1‧2위 재벌을 위해 그 주무기를 노동자들에게 가차 없이 휘둘렀다. 피묻은 댓가인 재벌의 돈으로 자신과 업계 7위 로펌인 지평의 배를 불렸다. 노동법 전문가인 김지형 변호사가 한국사회 최대의 노‧자 문제인 노조파괴와 불법파견에 대해 재벌 편에서 변호했다면 그는 확실한 반노동 법조인이다. 이러한 친재벌 반노동 인사가 진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의 주무기에 비하면 과외활동쯤 되는 이런저런 위원장 활동을 통해 진보 이미지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한국사회는 진정 이 정도로 호락호락 쉬운 사회일 뿐인가?


김지형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하기 1시간 전에 지평 앞에서 유성범대위와 민중공동행동 재벌특위가 규탄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그런데 기자회견을 개최하기 직전까지 진보진영 내로부터 다양한 경로로 우려가 전달되어 왔다. 완곡하게 에둘러서 표현되었지만 결론은 진보 법조인 김지형 변호사를 공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가 재벌 구원투수로 나서는 마당에서도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여전히 그를 진보인사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김지형 변호사의 이중적 행보에 대해 진보진영의 책임이 적지 않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김지형 변호사가 활동한 최근 몇 년간의 각종 위원회는 대체로 노‧자 간 계급대립이 첨예한 사안들과 관련된 것이다. 특히 자본의 착취와 수탈로 인해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어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부각된 사안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노동자투쟁으로 요구를 완전히 쟁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차선의 성과물로 남긴 것이 조사 또는 조정위원회이다. 이러하다 보니 위원회에 필요한 사회적 권위를 가지면서도 자본과 정부 측이 강력하게 비토하지 않을 인물이 설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삼성 백혈병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은 대법관 출신의 진보적 법조인이라는 사회적 권위에 주목했을 것이고, 자본 측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무죄선고 이력을 주목했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필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유성범대위 집행위원장을 맡은 유성기업 노조파괴 분쇄투쟁과 시민대책위 단식대표단으로 참석한 김용균투쟁 모두에 김지형 변호사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김용균 특조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변호사가 유성기업 노조파괴의 사측 변호사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대형 로펌들과 자본의 결탁구조 속에서 거액을 받고 있는 거물급 법조인들의 이중성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용균 특조위원장에 요구되는 사회적 권위 외의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그가 진보 법조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계급적으로 어디에 서 있건 그의 권위가 당면 문제에 도움이 된다면, 진보의 주체로 자리매김해 주는 실용주의가 ‘진보 법조인’ 김지형을 탄생시킨 것 아닐까?


한국의 ‘진보 스펙트럼’이 민주당 세력부터 시작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이 단지 자유한국당이나 조선일보가 규정하는 ‘꼴보수’적 기준 때문만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공세기에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약화되고 수세에 몰리면서 진보진영은 스스로 진보의 가치를 후퇴시키고, 진보의 주체에 대한 기준선을 무너뜨려 왔다. 삼성재벌 준법감시위원장 김지형 사건은 계급적 기준에 입각하여 가치와 주체 양면에서 진보의 재구성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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