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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Ⅱ 군산형 일자리


문재인형 일자리,

노동자에겐 을사조약이다


이주용┃기관지위원장



뒷날 문재인 정부는 필경 ‘노동권 매각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 10월 24일, 이제는 “명신”이라는 기업(이 이름을 잘 기억해두자)이 인수한 과거 한국지엠 군산공장에서 “군산형 일자리 상생 협약식”이 열렸다. “명신”을 비롯한 자동차 제조 관련 중소‧중견기업 5곳이 2022년까지 4천억 원을 투자해 전기차 생산거점(클러스터)을 만든다는 것인데, 올 1월 “광주형 일자리 투자 협약식”에 이어 이번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축사까지 했다. 정부‧여당은 ‘상생형 일자리’라는 이름을 붙여 홍보하고 있지만, 기실 여기에서 ‘상생’의 주체는 정부와 자본이다. 일단 정부는 ‘지역 일자리를 만들었다’는 치적 홍보로 이득을 얻는다. 가뜩이나 고용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이 정부에게는 더욱 절실한 가시적 성과일 것이다. 한편, 자본은 자신의 이윤을 위해 투자하면서도 파업과 임금 인상에 대한 걱정 없이 노동자를 부려먹을 수 있는 ‘권리’를 따낸다. 여기에 중앙정부와 지자체 지원금을 비롯한 각종 혜택이 듬뿍 따라오는 건 덤이다.


광주형 일자리와 군산형 일자리는 물론 문재인 정부의 중요한 치적 사업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개별적 사업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정부가 즐겨 쓰는 표현대로 “테스트베드”, 곧 실험장이다. 테스트를 거친 ‘기술’은 그다음엔 실험장 밖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세상 곳곳을 파고든다. 산업의 위기와 구조조정에 대한 얘기가 하루가 멀다고 오르내리고, 산업 재편과 맞물려 민주노조를 배제하기 위해 자본이 새로운 전략을 짜는 지금, 정부와 보수 정치세력이 합심해 파업권‧쟁의권을 틀어막고 노동 유연화와 장시간 노동을 확대하는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다. 광주와 군산에서의 ‘실험’을 모든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형 일자리’에 다시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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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 협약’의 협박


현재 군산형 일자리 ‘상생 협약’의 전문은 확인하기조차 어렵다. 협약 전문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광주형 일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사안을 취재한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지금까지 광주 외에도 구미, 밀양, 강원 등 ‘○○형 일자리’ 사업을 추진한 지자체들은 “투자협약문이나 상생협약안 전문도 비공개한다.” 해당 매체가 인용한 지자체 관계자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부분이 아니고, 자칫 공개될 시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1 대체 얼마나 많은 독소조항을 품고 있기에 전문 공개조차 꺼리는 걸까.


다행히 금속노조의 비판 성명2을 통해 군산형 일자리 협약안의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일단 군산형 일자리에 참여하는 5개 기업체 노‧사와 지자체가 “전기차 클러스터 상생 협의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상생 협의회’가 노동자들의 교섭권과 쟁의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첫째, ‘지역 공동교섭’이라는 미명 하에 ‘상생 협의회’ 산하에 ‘임금관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위원회가 ‘적정 임금구간’을 결정한다. 개별기업 노‧사는 이렇게 ‘임금관리위원회’가 통보한 범위 내에서 임금교섭을 진행해야 한다. 둘째, 노‧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5년간은 ‘상생 협의회’의 조정안을 수용해야 한다. 셋째, 만약 협약 내용을 위반할 시 지자체가 지원금을 전액 회수할 수 있다.


정리하면, 노동자들은 ‘적정 임금’이라며 미리 정해진 수준 이상의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도 없고, 맞서 싸울 수도 없으며, 정부와 지자체의 강제조정을 거부하면 금속노조의 표현처럼 “폐업하고 일자리를 날려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아들어야 한다. 당장 작년에 공장 폐쇄를 맞았던 한국지엠 군산공장 바로 그 자리에서 이런 협박성 협약을 맺었다는 것도 얄궂지만, 지난 광주형 일자리 협약에서도 ‘5년간 임단협을 유예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바 있다.


1905년,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제하며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이후에는 사법권, 행정권, 군권까지 빼앗으며 결국 식민지로 삼았다. 지금 문재인 정부와 자본가들이 ‘상생’과 ‘협력’을 내걸고 노동자의 교섭권과 쟁의권을 박탈하겠다는 이른바 ‘상생 협약’이 노동자에게 을사조약이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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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청와대]



노조파괴 기업이 ‘상생’ 대표?


그런데 문재인은 노동권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이 협약 내용에 대해 ‘축사’에서 “노사협력의 모범”이라고 치켜세웠다. 교섭권과 단결권을 틀어막으면, 설령 노동조합이 있다 한들 ‘협약 위반(그리고 폐업 협박)’을 감내하지 않는 이상 식물 상태로밖엔 존재할 수 없다. 이를 반영이라도 한 듯, CBS 노컷뉴스 보도에 따르면 현재 군산형 일자리에 참여한 업체 가운데 “노조가 있는 기업이 없”다.3 중소벤처기업부가 당일 발표한 보도자료를 봐도 참여기업 중 “명신”을 제외한 나머지 4개 회사는 ‘노조’가 아닌 ‘노동자대표’가 참여한 것으로 돼 있다.


이 가운데 한국지엠 군산공장을 인수한 기업이자 사실상 군산형 일자리를 대표하는 “명신”이라는 회사는 그 연원을 따지면 악랄한 노조파괴를 자행하던 기업이다. “명신”은 “MS오토텍”이라는 회사의 계열사로, 이 회사의 모태는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과 함께 오랫동안 현대차에서 경영을 맡았던 이양섭이 세운 “명신산업”이다. 지금도 이 세 회사는 하나의 그룹에 속해 있으며, 법인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고, 모두 이양섭 회장 일가가 지배한다.


현대차 납품업체인 명신산업에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가 들어섰지만, 1990년대 중반 무렵 사측이 깡패들을 동원해 정식 직원으로 취업시킨 뒤 현장을 장악해 민주노조를 뒤엎고 ‘복지조합’이라는 어용노조를 만들었다. 당시 신종 노조파괴 기법이었지만, 그 결과 1997년 이 회사는 “노사화합 대통령상”을 받는다. 같은 계열사였던 MS오토텍에도 마찬가지로 ‘복지조합’이라는 이름의 어용노조가 만들어졌는데, 이후 17년이 지난 뒤 2013년에 비로소 MS오토텍과 명신산업에 다시 민주노조 깃발이 올랐다. 구조조정과 노동강도 강화, 비정규직 확대에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20년 가까운 세월을 뚫고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명신 자본은 노조 설립총회를 저지하기 위해 정문을 막고 총회장 전기를 끊는가 하면, 사무직을 현장에 대체인력으로 투입하는 등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4 바로 그 명신 자본이 지금 문재인이 “노사협력의 모범”으로 칭송한 군산형 일자리의 주역인 셈이다.



나랏돈으로 마루타


결국 내용으로 보나, 핵심 참여기업의 내력으로 보나, 군산형 일자리가 내세우는 ‘노사협력’은 ‘민주노조 근절’이다. 노동권 박탈의 기반 위에서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를 상대로 마루타를 자행한다. 군산형 일자리 협약은 탄력근로제를 통한 노동시간 유연화 확대와 함께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도입도 포함하고 있다. 탄력근로제와 직무급제, 여기에다 쟁의권 제한이라는 군산형 일자리의 ‘전제 조건’까지 더하면 완벽하게 문재인 정부와 자본이 힘을 쏟고 있는 노동개악의 모습이 나타난다. 게다가 동아일보 기사에서 명신 부사장이 언급한 내용을 보면, 전기차 생산 라인에서 자동화‧효율화를 끌어올려 “기존 국내 공장보다 2배 이상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5 자본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공간이자 노동자를 쥐어짜는 데 최적화된 현장. 이것이 ‘문재인형 일자리’가 만들어내는 미래다.


이 마루타에는 막대한 공공 재원까지 들어간다. 지난 2월 정부가 발표한 <상생형 지역일자리 모델 확산방안>에 적시된 예시를 보면, 설비투자 900억 원을 투입할 시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하는 보조금 234억 원에 세액공제 연 45억 원을 비롯한 각종 취득세‧재산세 감면 등 온갖 지원금과 세금 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이번 군산형 일자리 투자 액수가 4천억 원임을 감안하면, 정부와 지자체가 쏟아붓는 지원도 훨씬 더 클 것이다.


문재인은 군산형 일자리 협약식에서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를 거론하며 “군산은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산형 일자리’가 선물인 마냥 자랑했다. 하지만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에서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며 멀쩡한 일자리를 없앤 건 바로 정부와 자본이었다. 더구나 정부는 군산조선소를 폐쇄한 현대중공업에 도리어 국유기업 대우조선해양을 팔아넘겼고, 군산공장을 폐쇄한 한국지엠에는 8천억 원의 지원금을 바쳤다. 가령, 지엠에 퍼준 8천억 원은 지금 군산형 일자리 투자액의 2배 규모다. 얼마든지 공적 책임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지킬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일자리를 빼앗은 뒤 ‘없는 것보다는 나쁜 일자리라도 있는 게 어디냐’고 선심 쓰듯 던지는 변명이 통할 수 없는 이유다.



1 미디어오늘, <○○형 일자리 우후죽순… ‘상생 가치’ 어디로?>, 2019.10.12.

2 금속노조, <정의가 사라진 공장, 노동을 부정한 협약서>, 2019.10.24.

3 노컷뉴스, <‘전북경제의 엔진’ 군산, 상생형 일자리로 체질 바꾼다>, 2019.10.24.

4 민주노총, <이주노동자 노조조직화 사례 연구>, 2013. MS오토텍은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일하는 사업장이기도 한데, 2013년 민주노조 설립 당시 이주노동자들도 함께 투쟁에 참여하며 조직화가 이뤄졌다. 때문에 이 사례집에서 MS오토텍과 명신산업에서의 민주노조 설립 과정, 그리고 명신 자본의 노조 탄압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5 동아일보, <GM 군산공장 인수한 명신 “2021년부터 전기차 年 3만대 생산”>,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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