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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에 오는 전쟁 같은 이야기 (1)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누군가 죽으면 그로 인한 슬픔은 각자의 몫이고, 가족 공동체가 함께 겪어야 하는 일은 남긴 재산을 둘러싼 전투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먹을 것을 많이 남긴 집안일수록 많이들 그런 전투를 치른다. 2004년 한 비정규직노동자, 박일수 열사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소위 열사투쟁을 담은 <유언>에는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만들고 나서 보니 그런 이야기가 됐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2004214일 새벽. 울산에서 한 노동자의 죽음이 있었다. 분신 자살이었다. 죽은 사람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였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그의 유언이었다.” 이런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유언>은 그가 왜 죽었는지 보다는 그가 죽은 후에 현대중공업이라는 회사와 현대중공업의 노동조합, 소위 직영노동조합, 그리고 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 마지막으로 박일수 열사가 일했던 하청업체의 동료들 중심의 하청노조, 이렇게 입장이 서로 다른 네 세력이 얽혀서 열사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싸우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박일수 열사가 분신을 할 시점에 현대중공업에는 만오천여 명에 달하는 하청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정규직 노동자의 수보다 많았다. 직영노조는 이미 오래 전에 어용노조로 전락했고, 하청노조는 바로 전 해에 노동조합을 건설했으나 활동을 전혀 보장받지 못한 채 노조간부가 회사에서 쫓겨나는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현장은 직영이고 하청이고 간에 노동자들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살얼음판이었다.

박일수 분신 후, 하청노조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직영노조에게 연대 요청을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현중 직영노조는 당시 민주노총 소속 노조였다. 직영노조 위원장은 하청노동자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난 어용이니까 너희는 민주파하고 해라. 대신에 방해는 안 하고 뒷짐 지고 있겠다.” <비정규직 차별철폐, 노동탄압 분쇄, 고 박일수 열사 분신투쟁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꾸려졌다. 민주노총울산본부, 금속산업연맹, 사내하청노조 그리고 직영노조가 당시 대책위에 참여했다.

 

직영노조의 대책위 탈퇴 선언과 열사의 딸 납치 사건

첫 번째 에피소드는 박일수를 열사로 볼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열사가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열사 칭호를 거부한 것은 물론 직영노조의 위원장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결정할 당시 4명의 운영위원이 있었는데, 직영노조 위원장은 그 중 한 명이라 열사 칭호를 붙이는 데는 큰 문제가 안 됐다. 열사 칭호가 붙여지자 바로 다음날, 직영노조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연다. 대책위가 박일수 분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며 대책위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다음의 에피소드는 박일수 열사의 딸, 납치 사건이다. 직영노조의 탈퇴 선언 이후 대책위는 직영노조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다. ‘함께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를 놓고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박일수 열사의 못 다한 투쟁을 이어가겠다는 첫 투쟁이 터져 나왔다. 박열수와 같은 동료인 하청노동자들과 뜻있는 직영노동자들 몇 명이, 별도의 대책위를 꾸렸다. 꾸린 바로 다음 날 잔업거부 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첫 투쟁이 있던 바로 그날 밤, 열사의 딸이 한밤중에 납치가 됐다. 납치해간 자동차 안에는 분신한 박일수를 병원으로 옮긴 직영사람이 있었다. 이 날의 납치는 직영노조와 사측, 그리고 관할 경찰서인 동부경찰서 까지 참여한 세 무리의 악당들이 공조했음이 곧 밝혀졌다. 사측은 이 분신사건이 더 커져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방안으로 유가족과 빨리 합의를 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납치사건은 불난 데 휘발유 붓는 격이 되었다. 이후 50여 일간 진행된 치열한 박일수 열사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발화점이었다.

 

본격적인 열사투쟁의 이야기는 다음 호에.

 

* <유언- 박일수 열사가 남긴 56일간의 이야기>: 80/2005/현대중공업사내하청노동조합-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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