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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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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8.11.15 14:23

어리쌀바구미

 

밥을 지으려고 플라스틱 쌀통을 열어보니 작고 거뭇한 벌레들이 바글거렸다. 눈에 띄는 걸 몇 마리 잡아내 보지만, 이내 쌀 속에서 다시 서너 마리가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몇 분 동안 잡은 게 오십 마리가 넘는다. 벌레 크기는 3mm쯤 되고 주둥이가 길쭉하게 생겼다. 어느 날 갑자기 쌀통을 점령해 버린 벌레는 가장 흔한 쌀벌레인 어리쌀바구미다. 쌀을 씻는데, 또 어리쌀바구미 몇 마리가 물에 떠올랐다. 씻어도 씻어도 벌레가 계속 나와, 할 수 없이 몇 마리쯤 먹는다고 문제 될 게 없겠지, 오히려 단백질 보충하는 게 되겠거니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냥 밥을 안쳤다.

바구미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무리다. “바구미과는 한 개과로 해서는 생물계 최다의 5만 종, 바구미상과에서는 7만 종에 달하여 전 동물 총 종수의 20분의 1을 차지한다.” [<한국의 딱정벌레>/김정환/교학사] 바구미의 특징은 코끼리 코처럼 길게 나온 주둥이다. 아무리 단단한 식물질이라도, 구멍을 뚫고 자를 수 있는 길쭉한 주둥이를 달고서 스스로는 딱딱한 딱지날개로 감싸고 있는 바구미를 보고 있으면, 이 조그만 벌레들이 어떻게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생물이 되었는가 짐작해 볼 수 있다. 주둥이는 식물질을 파먹는 데에도 쓰이지만, 알을 낳는 도구로도 쓰인다. 바구미 무리 암컷은 단단한 식물 줄기나 열매에 주둥이로 구멍을 뚫고, 몸을 돌려 구멍 속에 배 끝에 있는 산란관을 꽂아 넣고 알을 낳는다. 알을 까고 나온 애벌레는 그 속에서 식물질을 갉아 먹으면서 자란다.

밥은 안치고 제대로 벌레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200마리 쯤 잡았는데도 쌀을 휘저으면 또 벌레가 보인다. 벌레를 잡는 내내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저 벌레는 언제 어떻게 쌀통 속에 들어간 걸까. 애벌레는 보이지 않더니 어떻게 갑자기 어른벌레가 떼로 나타난 걸까. 플라스틱 밀폐용기 속으로 벌레가 날아 들어가 알을 낳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 벌레는 쌀을 쌀통에 넣기 전 쌀을 도정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이미 생겼을 게다.

어리쌀바구미는 쌀을 비롯한 보리, , 옥수수 따위 저장 곡물을 먹고 산다. 어리쌀바구미는 곡물 낱알에 구멍을 뚫고 구멍 안에 알을 한 개 낳고는 끈적한 물질을 내어 구멍을 막아버린다. 암컷 한 마리는 300500개 쯤 알을 낳는다.낱알 속에서 번데기가 되었다가 날개돋이를 하고 어른벌레가 되어 낱알을 뚫고 나온다. 낱알 밖으로 나온 어른벌레는 이번에는 낱알 겉을 갈아먹는다. 어른벌레로 4개월 쯤 사는 동안 한 마리가 낱알 100개에 피해를 입힌다고 한다.

어리쌀바구미는 화랑곡나방, 거짓쌀거저리와 함께 저장 곡물에 꼬이는 가장 악명 높은 해충이다. 화랑곡나방이나 거짓쌀거저리는 가루로 가공된 식물에서도 잘 살지만, 어리쌀바구미는 가루로 된 식품에서는 살지 못한다. 낱알 속에 알을 낳고 그 속에서 애벌레가 자라기 때문이다.

어리쌀바구미를 잡다가 포기하고 쌀을 먹는 것보다 쌀벌레를 같이 먹는 게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쌀벌레들은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곡물을 먹으며 살아왔고, 사람이 농사를 짓고 곡물을 주식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사람의 역사에서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곡물을 먹도록 진화해온 쌀벌레들에게 곡물은 최고의 먹을거리이겠지만 여전히 사람의 몸은 곡물을 주식으로 먹기 이전에 머물러 있다. 쌀벌레들은 곡물을 그대로 갉아먹지만 사람은 곡물을 날 것 그대로 먹지 못한다. 싹 틔우고 발효시키고 갈고 익히는 조리과정을 거쳐 곡물 속에 들어있는 반 영양소를 없애고서야 먹을 수 있다. 곡물은 대개 탄수화물로 이루어져 있다. 탄수화물은 당이다. 우리 몸은 스스로 당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따로 탄수화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쌀보다 어쩌면 쌀벌레가 더 나은 먹을거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도토리에 알을 낳는 바구미를 연구하던 파브르는 학문이란 어리석어 보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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