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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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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8.09.17 13:19

방아깨비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초가을 들녘은 메뚜기 세상이다. 지난 한 달 돌보지 않아서 바랭이로 덮인 텃밭을 갈아엎으니 벼메뚜기, 섬서구메뚜기들이 튀어 달아난다. 개천가 산책길을 걷다 풀밭을 들추니 팥중이, 끝검은메뚜기, 청분홍메뚜기들이 툭툭 튀어 오른다. 추석 무렵 무덤가는 메뚜기들 낙원 같다. 벌초를 하면 온갖 메뚜기들이 튀어 날아오른다. 그곳이 자기 영토라고 시위라도 하듯 튀어 날아오른다. 메뚜기 시위대엔 팥중이, 콩중이, 등검은메뚜기, 두꺼비메뚜기도 보이고, 잔디를 좋아하는 방아깨비도 많이 보인다. 방아깨비 수컷은 마치 구호라도 외치듯이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풀만 들추면 이리저리 뛰는 메뚜기를 보면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라는 속담이 무색해진다. 메뚜기는 대개 봄에 알을 까고 나와 여름에 어른벌레로 자라나 가을에 알을 낳고 죽을 때까지 내내 풀밭에서 산다. 메뚜기는 번데기 시기가 없는 못갖춘탈바꿈을 한다. 갖춘탈바꿈을 하는 곤충들이 번데기 시기를 거치고 나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고치를 뚫고 나와 날개돋이를 하고 어른벌레가 되는 것과 달리, 메뚜기는 애벌레 시기에 허물을 벗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날개가 자란다. 그래서 애벌레 때 모습과 어른벌레 때 모습은 크기가 다를 뿐 거의 같다. 메뚜기 종류 가운데는 5월에 이미 어른벌레가 되어 시약시약 울어대며 짝을 부르는 삽사리가 있고, 어른벌레로 겨울을 나서 사철 볼 수 있는 각시메뚜기도 있다. 그러고 보면 메뚜기는 6월 한철이 아니라 철이 따로 없다.


길가에 우거진 가을강아지풀을 헤치니 메뚜기 가운데 가장 몸이 긴 방아깨비 암컷이 큰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풀 아래로 떨어져서 허겁지겁 도망을 친다. 방아깨비 암컷은 잘 날지 못한다. 몸집이 훨씬 작은 수컷은 앞날개와 뒷날개를 서로 부딪쳐서 따다다다하는 소리를 내며 잘 날아다닌다. 이렇게 소리를 내서 암컷을 부른다.


텃밭에서 방아깨비가 배추, , 상추 따위를 갉아 먹는다고 해서 보면 방아깨비와 닮은 섬서구메뚜기다. 섬서구메뚜기는 뾰족한 머리가 방아깨비와 닮았지만 방아깨비보다 몸이 짧은데 특히 뒷다리가 훨씬 더 짧다. 들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 밭에서 기른 채소나 곡식, 과일까지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섬서구메뚜기와 달리 방아깨비는 잔디나 벼, 수수 같은 벼과식물을 먹기 때문에 텃밭 안으로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 방아깨비는 논에 벼를 먹으러 들어간다. 그래도 떼로 생겨나서 논농사에 피해를 입히는 벼메뚜기와 달리 극성스럽지 않아 해충으로까지 여기지는 않는다.


예전에 아이들은 방아깨비를 좋아했다. 방아깨비 뒷다리를 모아 쥐면 방아깨비가 몸을 꺼떡꺼떡 흔들어 대는데, 그것이 꼭 디딜방아를 찧는 모습을 닮았다. 아이들은 방아깨비를 잡아서 뒷다리를 잡고 방아를 찧게 하면서 놀았다. 방아를 찧는 장단에 맞추어 노래도 불렀다. ‘아침 방아 찧어라 저녁 방아 찧어라 꺼떡꺼떡 잘 찧는다아이들은 뒷다리를 잡을 때 뒷다리의 무릎 쪽에 더 가까이 쥘 때 방아를 더 잘 찧는 걸 알게 되고, 어떤 방아깨비가 방아를 더 잘 찧는지 겨루기도 하며 놀았다. 놀다가 허기지면 방아깨비를 구워서 먹었다. 놀잇감이 되고 군것질거리가 되는 친근한 방아깨비는 백석 시인의 동화시에도 등장한다. 개구리가 얻어온 벼 한 말을 방아 없어 찧지 못하자 방아깨비가 이 다리 찌궁 저 다리 찌궁벼 한 말을 다 찧어서 한솥밥을 지어 함께 둘러앉아 먹는다는 이야기다.


그 많던 방아깨비가 다 사라졌다고 하지만, 예전보다 줄기는 했어도 도시 공원 잔디밭이나 개천가 산책길 갈대나 억새밭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방아깨비가 사라진 게 아니라 방아깨비를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이 사라졌고, 방아깨비 놀이와 이야기가 아이들의 삶과 멀어진 게다. 그래도 아이들 데리고 가까운 들로 나가면 아이들은 벌레를 잘도 찾아낸다. 방아깨비를 잡으면 서로 방아찧기 놀이를 해 보겠다고 손을 내민다. 그러니까 방아깨비를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이 사라진 게 아니라, 아이들이 들로 나가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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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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