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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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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191710월 러시아 노동계급은 사상 최초로 국가권력을 장악해 착취 없는 세상을 향한 도정에 나섰고, 이로써 이론과 구상에 머무르던 사회주의는 물질적 실체를 갖춘 현실이 되었으며, 혁명의 승리는 전 세계 피착취 대중의 용기를 자극했다.

소련 몰락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역사적 보고다. 2017, 우리에게 러시아 혁명은 무엇인가. <변혁정치>가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를 시작한다. 3차례에 걸친 연재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 둘째, 볼셰비키 이행전략을 둘러싼 논쟁, 셋째, 레닌주의는 스탈린주의를 낳았는가.


 

러시아 혁명, 주체로서의 볼셰비키

 

백종성정책선전위원장


   

러시아 혁명이 볼셰비키 쿠데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히 일어난 대중행동만의 결과도 아니다. 대중과 혁명 당파가 융합할 때 역사는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러시아 혁명은 극명하게 드러냈다. 볼셰비키는 혁명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가능케 하고자 행동했다. 정세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론과 구상을 끊임없는 실천으로 설파할 수 있는 능력은 볼셰비키의 도드라지는 강점이었고, 그 기질에는 역사적 배경과 철학적 기초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질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계기, 볼셰비키를 볼셰비키로 만든 계기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19141차 세계대전은 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결과했다. 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는 애초 그 사상체계 자체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은 언젠가 실현될 그 무엇이 아니다 2인터내셔널의 붕괴와 볼셰비키

2인터내셔널은 맑스주의를 단선적 사회진화론으로 해석했다. 자본주의는 발전하고 있었고, 노동계급은 늘고 있었으며, ‘최초의 노동자 정부’ 1871년 파리코뮌이 상징하듯 19세기 후반 노동계급은 정치적 각성을 시작했다. 그리고 백만이 넘는 당원과 수천 당 조직을 거느린 독일사민당은 유럽 노동운동의 대표 격이었다. 1877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9.1%, 49만 표를 얻어 11석을 확보한 독일 사민당은, 1890년에 19.7%, 142만 표를 얻어 35석을 확보했고, 1912년에는 유효득표의 34.8%, 425만 표를 얻어 397석 중 110석을 확보했다. 독일사민당이 원내 1당 지위에 오른 것이다. 시간은 그들의 편임을, 역사 자체가 증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자본주의 자체가 노동계급에게 필연적 승리를 가져다주리라 믿었기에, 이들은 자신의 일상 임무를 의석 확대와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 획득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이 이를 집약했다. 1891, 독일사민당은 에르푸르트에 모여 새 강령을 채택했다. 에르푸르트 강령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최대강령이라고 불린 첫 부분은 자본주의 모순과 사회주의 지향을 정식화해 카우츠키가 작성했고, 최소강령이라고 불린 둘째 부분은 민주주의와 노동계급 복지확대를 위한 당면 요구를 정식화해 베른슈타인이 작성했다. 문제는 양자가 일상에서 어떤 관련이 있느냐였다. 최대강령에 담긴 사회주의 원리와 최소강령에 담긴 당면 과제 사이에는 큰 틈이 있었으나, 독일사민당은 역사 자신이 그 틈을 메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엥겔스는 다음 말로 이를 비판했다. “가재가 껍질을 깨뜨리는 것 같이 사회도 낡은 사회체제로부터 성장해 그 낡은 껍질을 폭력적으로 깨뜨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자문해보지 않고, 오늘날의 사회가 사회주의로 성장해 갈 것이라고 자신과 당에 그럴싸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엥겔스의 말처럼 진화론적 환상은 자본주의 위기와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사회주의를 언젠가 저절로 도래할 그 무엇으로 규정한 2인터내셔널과 독일 사민당에게, 혁명적 위기를 가속할 전시 계급투쟁은 불가능한 행위였다. 결국, 191484일 사민당은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지며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든다. 독일사민당이 애국주의에 굴복했다는 사실은 전쟁 그 자체만큼이나 큰 사건이었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처럼 사민당은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가 너무나 단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기초가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리고 있을 때도 단지 정상대로돌아가기를 기도하며,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를 일시적 사건 정도로 보고, 위기 시의 투쟁도 난공불락 자본주의에 대한 터무니없는 반란으로 간주했다. 이제, 위기 자체가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않음이 드러났다. 폐허 위에 새로운 주체가, 전쟁이 낳은 위기에 혁명적으로 개입할 세력이 형성되어야 했다. 레닌은 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논하며 혁명적 정세가 모두 혁명을 낳는 것이 아님을, 혁명적 대중행동으로만 가능한 것이 혁명임을 역설했다. 정세의 거대함에 짓눌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중을 이끌 주체가 없다면 위기는 또 한 번의 위기일 뿐이다. 그랬기에, 그람시가 말했듯 볼셰비키적 당은 어떤 조건에서도 대중과 접촉하여 역할 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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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기 있고, 체계적이고 집요한 정치행위 소비에트와 볼셰비키

1차 대전은 러시아 노동운동에 재앙이었다. 전투적 노동자는 전선으로 차출됐고, 파업은 가혹하게 처벌됐다. 그러나 전황은 패색이 짙었고, 이는 러시아 체제에 대한 환멸로 이어진다. 1915년 이후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요구하며 격렬한 투쟁에 나선다. 자본가들은 1915년 여름 군사산업위원회를 조직해 애국주의 속에 노동자를 가두려 했지만, 체제는 이미 노동자를 붙잡을 힘이 없었다. 1916년 말 이후 소요는 점증했다. 1917126일 밤, 전제정치 종식을 주장한 군사산업위원회 노동자그룹 대표들이 체포되었고, 218일 푸틸로프 금속공장 파업은 222일의 연쇄파업으로 이어진다. 정세 고조 속에 223일 국제여성의날을 맞은 여성노동자 거리시위는 혁명의 결정적 포문을 연다. 혁명 발발과 함께 대중은 자신의 기관을 건설했다. 소비에트였다. 317일까지 49개 도시에서 소비에트가 있었다. 5일 뒤에는 77개가 되었으며, 6월에는 519개가 되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임시혁명정부가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허약한 부르주아는 곧 허약한 임시정부를 의미한바, 임시정부는 대중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소비에트라는 자치권력과 임시정부라는 공식권력의 병존, 즉 이중권력dual power이었다.

멘셰비키는 소비에트의 역할을 임시정부의 수호라고 규정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멘셰비키 니콜라이 치헤이제는 소비에트란 무엇보다 인민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멘셰비키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의 임무를 획득한 자유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에트에 대한 수동적 관점은 당면 혁명에 대한 기본적 입장에서 기인했다. 이들은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에 머물러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1917년 소비에트가 군대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매우 정치화했다는 것은 19172월 혁명이 단지 부르주아 혁명에 그치지 않을 전조였고, 볼셰비키는 그간 견지한 당면 혁명은 봉건잔재 일소를 위한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입장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을 폐기했다.

계기는 잘 알려져 있듯 레닌이 러시아 귀국과 함께 발표한 <4월 테제>였다. 레닌은 임시정부와 모든 협력을 거부해야 하며, 소비에트만이 유일한 혁명정부임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영토 전역에서 선출된 노동자, 농업노동자와 빈농의 대표가 구성하는 소비에트 공화국” - 4월 테제 중 다섯 번째 테제가 말하듯 소비에트는 새 국가의 맹아였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마냥 소비에트를 찬양하며 당의 역할을 제쳐놓은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는 항상 정치의 역할을 강조한 당인黨人이었고, 그들이 소비에트 자체를 절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소비에트로 권력 이양을 촉구한 4월 테제에서조차 분명하다. 레닌은 4월 테제 중 네 번째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당의 의식적 역할을 강조한다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들이 혁명정부의 유일한 가능 형태라는 것을 대중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 정부가 부르주아의 영향에 굴복할 때 우리 임무는 그들의 전술적 오류를 끈기 있게,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설명하는 것, 대중의 실천적 요구에 특별하게 부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테제는 소비에트가 유일한 혁명권력이나 그 권력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또한 정치세력은 그 오류를 실천으로 바로잡아야 함을 강조한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은 대중이 만든 소비에트가 대중 자신의 절박한 요구와 어긋나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4, 독일과의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가 야기한 위기에,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내 온건 사회주의자들을 임시정부 장관으로 수혈해 소비에트를 통제한다. 6, 임시정부는 전쟁 종식은커녕 러시아군에게 공세를 명했고, 이에 충실히 협조하던 소비에트 지도부의 입장으로 즉각적 종전은 더 요원해진다. 7월에는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병사들, 크론슈타트 수병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일으킨 봉기로 임시정부-소비에트-대중 사이 균열은 더욱 명확해지지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에 대거 입각해 다수파(8)로서 자유주의자들(7)과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볼셰비키는 불법화되고 레닌은 피신한다. 볼셰비키가 이 타격을 회복하고 10월 혁명으로 전진한 계기는 군부 쿠데타시도를 대중과 함께 방어하면서였다.

볼셰비키는 대중의 실천적 요구에 부응하는 끈기 있고, 체계적이고, 집요한 정치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전쟁이 낳은 위기를 혁명으로 연계한다는 확고한 좌표를 가지고 있었고, 정세개입 속에 대중정서를 감지할 촉수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략적 좌표를 당면 요구로 만들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1917년의 볼셰비키는 대중 속에서, 대중에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좌표를 향해 전진하는 주체 집단이었다. 이렇듯 러시아 혁명은 급진적 대중운동과 혁명적 정치세력의 유기적 융화가 만든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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