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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대투쟁의 조직적 성과를

지역연대조직 건설로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1988년 10월 9일 화왕산 노동법개정 등반대회. 마창노련을 비롯한 영남지역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 1988년 10월 9일 화왕산 노동법개정 등반대회. 마창노련을 비롯한 영남지역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대우조선 이석규열사 장례식을 계기로 무자비한 탄압과 보수언론의 여론몰이 속에 불길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양심과 선의로 투쟁에 나섰던 간부들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선진노동자가 확고히 자리 잡았던 노조는 해고와 구속에 직면했다. 3개월 동안 무려 525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다. 한편, 민주화운동세력은 후보단일화 실패 후 독자후보, 비판적 지지 등 대선을 앞둔 논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때 노동자대투쟁을 잇는 강력한 투쟁으로 사회 분위기를 바꾸자는 결의를 하고 통일 노동자들과 부산지역 노동자들이 상경투쟁을 계획했다. 이 투쟁은 노동운동사에서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동자대투쟁의 결과를 어디로 수렴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한 중요한 선도투쟁이었다.

 

마창노련 건설로 가는 선도투쟁

19871012통일 조합원 50여 명이 상경투쟁에 나섰는데 애초 목적지였던 민주당사 앞에서 반 정도 연행되고, 1520여 명이 다시 기독교회관 앞에서 연행되어 계획에 없던 국민운동본부에서 농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의 농성은 12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1023일 창원, 부산, 서울, 안양 등에서 노동자 11명이 민정당사를 기습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하였으며 27일에 서울에서 열린 노동운동탄압분쇄 결의대회에는 전국에서 4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하여 가두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각 지역의 노동자들이 국민운동본부 농성에 합류하고 구속자 가족 및 각 사회단체와 학생들의 지지 방문과 모금이 이어졌다. 이 투쟁은 선거정치에 매몰된 민주화운동세력에 경각심을 일으키고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자대투쟁의 성과를 연대조직 결성으로 모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알렸다. (<통일중공업노조 30년사><마창노련사>의 기록)

 

연대투쟁을 통해 결합력을 높이고 지도력을 세운 마창노련

1214일 마산창원지역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이 결성되었다. 야당의 대통령선거 패배가 예견되는 가운데, 대선 이후 거세질 탄압에 맞설 조직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서둘러 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끊임없는 투쟁 속에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주체가 만들어지고 노동운동 활동가 조직이 연결되었기에 가능하였다. 노동자들이 지역조직을 선택한 것은 87년 투쟁을 전개했던 제조업 사업장이 집중되어 있고 가장 빠르고 자연스럽게 연대할 수 있는 단위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마창노련은 이후 전노협의 가장 튼튼한 기반이 되는 지역조직이지만 출발 당시 결합한 노조의 성격은 한국노총과의 관계에 별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정도로 어용과 민주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강령에는 노동해방의 그날까지 투쟁한다.”고 운동의 지향을 밝히면서도, 결성취지문에서는 한국노총 산하 연맹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고 밝혀 다소 느슨한 형태의 조직임을 알 수 있다. 노동자대투쟁으로 형성된 대중적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세력의 만남이 대선을 앞두고 서둘러 조직되어 마창노련 깃발 아래 어우러진 것이다. 마창노련의 과제는 결합력과 지도력을 높여 명실상부한 지역연대조직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마창노련의 지도력과 결합력에 비해 노동자대투쟁의 경험을 한 노동자들이 마창노련에 거는 기대감은 컸다. 마창노련은 이에 부응하는 지도력을 88년 임투를 통해 인정받아야 했으니 교육, 선전 등 모든 역량과 노력을 투여해 공동임투 준비에 나선다. 노동자들이 고안해낸 다양한 쟁의방법은 창의적이었다. 작업복 뒤집어 입기, 구두신고 사복입고 작업하기, 11벽보 붙이기, 한 공중전화 이용해 효도전화하기, 한 화장실 한 줄 서기, 배식구 하나 이용하기, 신협통장 찾기, 단체로 소화제 타먹기, 전원 조퇴하여 야유회 가기, 사원증과 명찰 안 달기 등 다양한 준법투쟁에 대부분의 조합원이 참여하면서 생산에 차질을 일으켰다. 임투 초기부터 노동자들은 힘의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비상대책위원회, 가족협의회, 소위원회, 정당방위대 등 다양한 투쟁조직을 만들었다. 특히 정당방위대는 자본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투쟁 사수와 연대를 위해 필수 조직이 된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대공장에 먼저 노조가 결성되었다면, 88년 한 해는 중소영세사업장에 노조가 속속 결성된 해였다. 마산과 창원에도 88년 들어 27개 신규노조가 탄생했는데 이들 조직 선거에서는 위원장에 당선되면 마창노련에 가입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리고 우리 노조는 파업 안 하나?”라는 요구가 자연스럽게 제기될 정도로 마창노련의 88년은 투쟁으로 이어진 해였다. 그 속에서 마창노련은 지도력을 인정받으며 가장 튼튼한 지역조직으로 거듭났다.


[참고자료]

김하경, <내사랑 마창노련()>, 갈무리, 1999

김정호, <끝나지 않은 저항>, 한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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