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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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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사회 건설, 첫걸음 뗐지만 낙관하긴 일러요.”

선체 인양으로 진상규명 끝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사회적 힘 길러내야

 


2014416, 그 날의 기억이 아프게 피어나는 세 번째 봄이 도래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지기도 했고, 또 많은 것이 여전히 그대로인 현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던 이들은 지난 3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416연대 운영위원이자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인 미류 동지를 <변혁정치>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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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16 세월호 참사 이후 벌써 세 번째 맞는 봄이네요. “4.16 그 날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는 우리 다짐과 약속은 과연 얼마나 이뤄진 걸까요?

A 이전까지는 한국사회에서 세월호 참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금기시될 정도로 억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세월호 참사를 지우기 위한 권력의 탄압도 모질게 이어졌던 시기였잖아요. 저는 적어도 박근혜 퇴진과 함께,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 또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힐 때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는 믿음에 대한 사회적 확인, 정치적 승인이 이뤄졌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구체적인 제도적 성과가 있었다면 아마 그건 특별조사위원회의 설립과 이같은 국가기구를 통해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사회적으로 겪었다는 점이겠죠. 국민의 힘으로 법을 만들고, 또 그 법을 통해 사회적 진상규명의 경험을 했다는 건 성과이자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지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서 한국사회라는 정치공동체 안에 관계의 토대를 마련해내지 않았나 싶어요. 예컨대, 세월호 이후 메르스 참사나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그랬죠. 과거에는 그냥 묻힐 수도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이 훨씬 더 감응하고 문제의식을 느끼게 됐으니까요.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을 단지 개인적 불행으로 남겨두지 않고 사회적인 사건으로 인지하려는 감각이 오롯이 형성된 시기였다고 생각해요.

 

피해자 고통 가중, 권리 유예시켰던 3

Q 지난 3년의 시간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은 물론, 발을 동동 구르며 가라앉는 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두에게 깊은 아픔과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미류 동지에게 세월호 참사는 어떤 의미인가요?

A 아직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란 게 사실은 해석 투쟁인 거잖아요.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그 시간들을 내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 시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일 텐데요. 그런 점에서 아직 저에겐 여전히 뭐라고 얘기할 수 없는 시간이에요.

인권운동이 그동안 여러 방면에서 인권침해 피해자들을 만나왔는데, 엄청난 숫자의 집단적인 죽음을 공통의 기억으로 갖고 있는 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게 제겐 쉽지 않은 숙제였던 듯 해요. 그 시간들을 내가 과연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그 시간과 내가 겪고 있는 이 시간 사이의 거리는 어디쯤일까,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된 것 같아요.

 

Q 1,089일 만에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온전한 선체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이야말로, 진실을 밝히는 첫걸음이 될 텐데요. 인양과 수습, 조사 과정에서 정부와 선체조사위가 보이고 있는 태도가 어떤 면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지 말씀 부탁드려요.

A 정부 태도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참사 이후로 일관되게 이 희생자들, 혹은 미수습자들을 끝까지 찾아야 한다는 의지가 결여돼 있다는 거예요. 참사 피해자들이 사망했다 하더라도 이들의 존엄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가족에게 인도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죠. 201411월 이후로 수중 수색이 중단되면서 9명의 미수습자가 남은 상태였지만, 참사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배가 완전히 침몰하고 나서부터는 사실 모두가 미수습자가 된 형편이었잖아요. 그런데, 정부는 수중 수색을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죠. 오히려 민간 잠수사들을 통제했었고, 수중 수색을 소홀히 하다 보니 급기야는 몇 차례 수색했다는 구역에서 미수습자가 발견되기도 했고.. 이런 과정을 겪다가 미수습자 가족들을 압박해서 수중 수색을 중단시킨 것이죠. 당시 수색도 수습을 위한 방편이었고, 인양 역시 수습을 위한 방편인데, 수중 수색 중단을 선언한 이후에 인양을 선언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면서 세금도둑운운하면서 마치 그게 정부의 의무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베푸는 시혜인 듯이 정치적인 협상 대상으로 삼았던 태도가 문제였다고 봐요.

그 이후로도 한 번의 기회 밖에 주어지지 않는 절박한 시간들이 계속 됐잖아요. 배를 올린다는 건 일종의 테스트가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래서 최선의 계획들을 세우고 그것들을 점검하면서 가야 하고, 당연히 이는 피해자 권리보장을 위한 과정이니 피해자가족들의 참여를 배제해선 안 됐죠. 그런데, 유가족들이 뭘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하거나 먼저 설명한 적도 없었죠. 인양업체 선정 과정에서도 문제가 많았어요. 기술점수를 높게 받은 업체가 탈락하고... 이렇게 의혹들만 계속 쌓으면서 시간을 지체했던 거예요. 이런 답답한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것이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시간일뿐더러, 그들의 권리를 유예시킨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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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정택용]


새로운 사회로 전환할 가능성 진상규명에 달렸다

Q 정권퇴진운동 시기 광장에서 가장 큰 공감을 받았던 의제는 세월호 문제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일단 첫 번째로는 세월호 참사 자체가 지닌 특징적인 성격이 있었다고 봐요. 규모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여타의 사고들과는 달리 누군가의 죽음을 생생하게 지켜본 목격자로 시민 모두를 불러 세운 사건이기도 했죠. 참사 당일부터 그 이후에도 어떻게 세상이 이 지경인가?’를 누누이 봐왔던 거잖아요. 물론, 세상이 그저 장밋빛이기만 할 거라 기대한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이 자기 삶을 기획하게 되는 그 밑바탕에는 사회공동체나 제도에 대한 신뢰가 자리하기 마련이잖아요. 이 믿음들이 무참히 깨져버린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였고, 그에 대해 저마다 풀어야 할 과제를 쉽게 넘겨 버리기 힘든 상황을 맞은 거죠.

두 번째는 일종의 지배이데올로기 때문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인식하게 될 때에는 그것을 날것 그대로 객관적인 사실로만 인식하지 않잖아요. 어떤 해석 틀로써 인식하게 마련인데, 사실 한국사회에서 반공이데올로기나 노동운동을 비롯한 조직된 운동에 대한 어떤 경계, 왜곡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광장에서 이야기됐던 여러 사안들이 누군가의 죽음이나 고통으로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게 한계이기도 했죠. 그런데, 다행히도 광장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 같은 일들이 그저 개인의 억울함이 아닌 기업의 잘못으로, 정부도 이 문제를 키워왔던 책임의 일 주체로 다시금 들여다보게 된 계기였다는 점은 광장의 가능성으로 주목할 지점일 것 같아요.

 

Q 박근혜는 내려오고 세월호는 올라오라는 광장 촛불의 외침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박근혜의 파면과 구속이 앞으로 진상규명 활동에 숨통이 트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

A 진상규명을 집요하게 방해했던 세력이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단죄됐잖아요. 하지만 낙관할 순 없다고 봐요. 사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도 내가 다음 사회의 수장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야당 후보들이 보여줬던 미온적 행보나, 관점의 차이들이 여전하기 때문이죠.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기가 그토록 어려웠고, 특조위 지키기도 마찬가지로 어려웠던 것을 무조건 박근혜 탓으로 돌릴 문제는 아니라 보거든요. 두 번째 우려는 재난참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사실 한국사회에서 별로 경험이 없어요. 앞선 참사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제대로 진상규명하고 책임자 처벌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하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어떤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것만 의미하진 않을 거예요. 저는 피해자가 할 수 있는 말과 그 사회가 하는 말이 같아지는 것이 결국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믿거든요. 그래서 진실이 치유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는 건데, 한 점 의혹 없이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길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이 진실을 밝혀가는 과정은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한 진상규명의 목표를 가지고 해당 시기에 할 수 있는 만큼 단계를 밟아가야 하는 것이죠. 이 과정이 최대한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하고, 그 속에서 수집하고 정리한 증거들을 다시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 제대로 위치 지우는 걸 2기 특조위의 몫으로 삼아야 할 것 같아요.

 

구체적 경험들 변혁의 과제로 연결시켜 냈으면...

Q 인양 이후 운동진영에 남은 과제는 어떤 것일까요?

A 앞으로 미수습자 수습 및 선체조사의 과정이 짧아도 반 년은 소요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2기 특조위를 만들어내는 등 다음 국면의 싸움들에서 이기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겠구요.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르게, 저는 한국사회에서 변혁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만들어진 지형 아래 어떻게 변혁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할지에 대해 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세월호 참사 이후 사실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이고, 이윤만 좇는 자본주의 체제가 일으킨 재앙이고... 사실 운동진영의 이런 진단이 일반 시민들이 말했던 이게 나라냐는 말과 도대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이 사회가 정말 총체적으로 문제라는 점을 사람들이 모르는 건 아닐 거예요. 우리 일상에서 부딪히는 사건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그래서 우리가 조금씩 바꿀 수 있는 건 무언지를 거시적인 전망 안에서 배치해 내는 게 변혁운동의 과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점에서 이 구조적 문제, 혹은 체제의 문제라는 추상과 세월호 참사의 구체적 경험 사이에서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한 과제를 함께 마련하고 힘을 규합해가는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뷰=임용현기관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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