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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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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쩌면

그냥 함께 비를 맞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굳이 노뉴단이 없었어도, 노동자 영상패는 그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카메라에 테이프를 집어넣어 쉽게 사물을 기록하고, 아무 데서나 앉아 편집기 2대를 연결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집할 수 있는 비디오라는 매체는, 확실히 누구나 쉽게 도전해 볼 만했다. 말할 것이 분명하고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꼭 전달해야 하는 이념집단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매체다.

 

매체로 할 수 있는 일에 쏠린 노동자들의 관심

이 매체를 배워 노동운동에 써먹고 싶어 노뉴단에게 SOS를 제일 먼저 친 것은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의 활동가 두 명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영상편집을 알려주기 위해서 노뉴단 2명이 각각 두 돌쯤 지난 아이만한 무게의 편집데크를 가슴에 안고 배움터로 잡아놓은 여관방으로 내려갔다. 하룻밤 새 뭘 하겠는가? 밤새 4명이서 술을 먹으며 노동운동에서 영상이 중요하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새벽까지 하다가 잠시 눈을 붙이고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가 알던 모르던, 노조가 직접 개입해서 영상패를 조직하고 일터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사건들을 노동자가 직접 촬영해내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과 기아자동차, 동아건설에 노동자 영상패가 생기고, 지하철에서는 준비 중에 있었다. 아직 편집까지 나아가고 있지는 못했다. 93, 전노협 문화국은 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문화국 내에 영상담당자를 두었고, 이 성과는 전노협이 해산되는 그 해 95년에 <1회 전국노동자영상수련회>*로 나타났다.

영상활동이 취미활동이 되지 않도록 노동자적 관점이 뚜렷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영상 수련회에 온 한 노동자의 말처럼 참여 노동자의 목적은 분명했다. 소속 조합원들의 의식화 교육을 위한 노조 조직화 사업의 일환으로 카메라를 잡기 시작했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매체 자체의 호기심보다는 매체로 할 수 있는 일에 호기심이 더 많았다. 영상제작에 관심이 있는 노동자에게나 노조에게나, 영상매체는 언제나 무언가의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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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등 기와집 사겠다는 헛꿈도...

노뉴단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도 그랬으니까. 조급증이 생겼다. 하나라도 더,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노동자들과 나누고 싶었다. 12일간 빡빡하게 촬영에 대해, 편집에 대해, 교육했고 평가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정기적인 영상잡지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영상노동자들의 전국소식지를 발간하자고 했다. 또한, 전국노동자 비디오 영화제를 열자고 했고, 분기별 전국노동자영상수련회를 개최하자고도 했다. 이 중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루어질 리가 없다. 열심히 가르쳐주면, 성심껏 알려주면, 노동자의 손과 발로 빚어낸 영상물이 나오고, 그것을 본 노동자들이 영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면 전국적인 노동자영상패의 건설 토대가 마련된다. 그때 전국소식지를 발간해서 바람을 잡고, 노동자영화제를 개최해서 더 크게 분위기를 띄우고, 나아가 전국조직을 건설하고, 그리하여 노동영상은 완성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1회 전국노동자영상수련회>를 개최하면서 한 마리의 닭을 산 것이다. 그 닭은 알을 많이 낳아 돼지를 살 수 있게 될 것이고, 돼지는 새끼를 많이 낳아 소를 살 수 있게 될 것이고, 소는 새끼를 많이 낳아 고래등 같은 기와집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이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대단한 기세로 가르치고 무섭게 닦달하곤 했다.

전국노동자영상수련회는 이후 매년 해서 3회까지 진행됐는데, 우리의 기세와는 달리 3년이 지나 이 수련회는 더 이상 개최되지 않았다. 대신에 수도권 영상패 모임이 만들어졌으나, 몇 년 못 가서 이마저도 흐지부지됐다. 우리가 처음에 닭을 사면서 했던 많은 상상들은 물론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영상패와 관련해서, 우리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더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그래서 단순한 수단에서 벗어나, 영상매체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기를, 좋아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가르치려 들지 말고, 닦달하지 말고, 그냥 놀아줬으면 어땠을까? 그런 수련회가 됐으면 어땠을까? ‘가르친다는 일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그런 것 말이다.

 

* <1회 전국노동자영상수련회> 19951145, 서울 숭실대사회봉사관 / 노동자뉴스제작단-전국노동조합협의회 주최 /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중공업, 캐피코, 전문노련 등에서 15명 정도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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