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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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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03.16 10:49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디딤돌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1986년은 이른바 3저호황으로 국민총생산이 10% 이상 증가하고 국제수지 흑자 규모는 45억불이 넘었다. 경기가 이러하니 노동자들이 87년 임금인상에 거는 기대는 컸다. 최소한 두 자리 수 이상 임금이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용 한국노총도 최소 26.6% 인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가 임금인상 상한선을 7%로 제시하면서 87년 봄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당시 크고 작은 투쟁은 의식적으로 주도된 경우가 많았다. 1985년 대우자동차 노동자 투쟁과 구로동맹파업 이후 학출노동자, 위장취업자에 대한 악선전과 색출이 강해졌다. 노동부는 노동운동과 위장취업자라는 지침서를 내고, 회사는 눈빛, 안경, 펜 자국 난 손가락, 말투 등으로 위장취업자를 가려내는 방법을 교육했다.

 

학출노동자가 주도한 서우구정보너스 쟁취 투쟁

서우는 인천 북구 갈산동에 위치한 봉제공장으로 340명이 일하고 있었다. 당시 시다는 2,700원을 받고 미싱사 B급은 3,500~3,700, A급은 3,800~4,000원 정도 받았다. 보너스는 200%고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60~70시간이었다.

이곳에서 1987124일 점심시간에 300여 명이 일제히 모터를 끄고 40여 분 작업을 거부하는 투쟁을 벌인다. 회사가 구정보너스를 3월로 연기한 데 대한 항의였다.

이 투쟁은 학출노동자가 치밀하게 준비하여 주도한 것이었다. 19871월 서우민주노조추진위원회가 비밀리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학출노동자들이 만든 소모임이 재편된 것이다. 당시 소모임은 떡잎회(준 핵심모임. 인원은 6. 8610월 도봉산 등산을 계기로 2주에 한 번 만나 친목 도모.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읽음. 임금·외채·자본주의에 관해 토론하고 전태일 추모식에도 참가), 덩어리(시다모임. 3.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읽고 이야기 나눔), 거친손(핵심모임으로 목적의식적 편재. 5. 1회 학습, 투쟁 때까지 10차례 학습), 독서회(외곽 친목모임. 5), 샘물(문화모임. 3. 풍물 등으로 만나 의식적 집단으로 전화시키려 함) 등이었다. 소모임 구성인자는 라인별로 골고루 포진해 있었는데 이후 노조 조직을 염두에 둔 것을 알 수 있다.

학출노동자들은 87년 임투를 염두에 두고 8611월초부터 노동자들의 불만사항을 체크하고 선진노동자를 조직했으며 임투 요구, 규모, 투쟁계획 등을 치밀하게 짰다. 1차 유인물에 어떤 내용을 담아 언제 배포할 것인지, 화장실 낙서 개시일, 2차 유인물 배포시기, 중식 후 작업 거부 계획, 선동자 선정과 연습, 1차 선동에 이은 2차 선동, 교섭이 열리면 라인별로 3~4명을 뽑아 교섭위를 구성하되 활동가는 3명 정도 가담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 진행은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1차 선전물이 배포되자 노동자들은 모두 맞는 말만 써있더라.”, “누군가 똑똑한 사람이 있을 거야.”, “잘하면 보너스 받겠다.”고 웅성거렸지만 한편으로는 관리자들의 발빠른 움직임에 주눅 들었다. 회사는 주동자를 잡아오면 5만원 씩 주겠다고 했다. 기숙생들을 격리 조사하여 활동가 5명을 적발해 예방 차원에서 월미도, 송도, 부산 등지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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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1986년 10월 21일자 .

대우자동차 노동자 투쟁과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정권과 자본은 '위장취업자'에 대한 대대적인 악선전을 펼치고 색출에 적극 나섰다


회사의 악선전과 색출로 난관에 봉착

124일 점심시간. “점심시간에 모터를 끕시다. 이대로 주는 대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서우 여러분 권리의식을 찾읍시다.” 선동을 한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끌려갔다. 노동자들은 작업을 거부한 채 누군가 또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예정되었던 2차 선동은 없었다. 회사가 먼저 작업을 중단하고 퇴근 조치했으며 상여금을 지급하여 사태를 마무리했다.

회사는 치안본부를 통해 학생출신 4명을 색출했다. 그리고 위장취업자는 불순분자다.”, “회사를 망하게 하려고 들어왔다.”, “불을 지른다더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학출노동자들은 출투를 하며 유인물을 배포했지만 회사의 집요한 공격에 노동자들로부터 멀어졌다.

투쟁주체였던 학출노동자들은 이 투쟁의 패배 요인으로 대중의 신뢰를 확보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중핵 건설에만 집중한 것, 기존 현장운동의 실패 경험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 점, 학출의 한계를 벗어나 절실한 노동자의 자세가 부족했던 점, 회사와 경찰의 역공세에 대한 준비 부족, 패배감과 포기등을 꼽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4.13호헌조치와 6.10항쟁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과 투쟁이 노동현장으로 이어져 새로운 주체를 형성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노동자 스스로 일어서려는 움직임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우리는 노동자들의 크고 작은 투쟁과 학출노동자들의 의식적 활동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소요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참고자료]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1987년 상반기 노동운동 자료집>,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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