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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번역] 파리코뮌 150주년(1)

 

 

반란을 일으킨 코뮌군

혁명으로 가는 길

 

 

 

번역자: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 150년 전 탄생해 2달여간 지속하다 지배계급의 잔혹한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던 ‘파리코뮌’이 받는 평가다. 파리코뮌은 그저 ‘실패로 끝난 혁명’이 아니라, 당대부터 그 이후로까지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영감을 끊임없이 불어넣은 원천이 됐다.

 

파리코뮌 15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좌파 매체 <Left Voice>는 3회에 걸쳐 코뮌의 배경과 그 속에서 이뤄진 혁명적 조치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다루는 연재기사를 게재했다. <변혁정치>는 이번 호와 다음 호에 걸쳐 이 연재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면 분량 등의 문제로 원문을 상당히 압축해 번역한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지만, ‘노동자권력의 원형’을 만들어냈던 파리코뮌의 경험에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번 호에 싣는 기사는 <Left Voice> 3월 14일 자로 게시된 Doug Enaa Greene의 글 “Insurgent Communards: The Road to Revolution”을 축약해 번역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3회분 연재 중 첫 번째다. 참고로 번역 과정에서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괄호() 안에 번역자가 덧붙이거나 주석을 달았다. 원문에 있던 각주는 대부분 출처를 밝힌 것으로, 이 번역글에서는 옮기지 않았다.

 

 

- 번역: 기관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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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년 3월 18일 파리 시내를 장악하고 바리케이드드를 쌓은 코뮌군. [사진: wikipedia]

 

 

1871년 6월, 프랑스 시인 외젠 포티에는 패배로 막을 내린 파리코뮌을 기리며 “인터내셔널”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1888년 피에르 드제테르가 “인터내셔널”에 곡을 입힌 이래로 이 노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민중가요가 됐다.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질 때마다 파리코뮌의 이상은 되살아난다.

 

하지만 파리코뮌이 노래로만 기억되는 건 아니다. 파리코뮌은 혁명가들에게 하나의 필수적 기준점이 됐다. 사상 최초로 노동계급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경험이기 때문이다. 파리코뮌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그 영웅적 투쟁과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속에서 나타났던 오류도 되새기면서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싸움을 위한 교훈을 곱씹어보고자 한다.

 

 

 

제2제정과 제1인터내셔널

 

1851년,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시대가 끝난 듯했다. 당시는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조카)가 불안정했던 제2공화국*을 이제 막 무너뜨리고 스스로 ‘나폴레옹 3세’라 칭하며 제위에 오를 무렵이었다(프랑스 제2제정). 부르주아지는 민주적 자유를 얼마든 경찰국가로 대체하고자 했다. 이들은 제2제정 치하에서 상당한 부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은 그런 행운을 나눠 갖지 못했다. 제2제정에서 노동계급은 정치적 자유나 노동조합도 없이 일해야 했다. 경찰의 치밀한 감시 속에 1853~66년까지 무려 4천 명의 노동자가 ‘단결금지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그러나 이런 억압이 먹혀들지 않자 나폴레옹 3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회유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결과 1864년에는 노조와 파업을 합법화하고 검열을 완화하는 일련의 개혁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가 기대한 것과 달리, 이는 혁명적 저항세력이 성장할 공간을 열어준 계기로 작용했다.

 

이 저항세력 중 하나가 바로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였다. 제1인터내셔널은 영국과 프랑스 노동자들의 회합을 통해 1864년 창립했다. 마르크스는 이 조직의 지도적 이념을 제시했고, 발기문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중대한 임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에서 제1인터내셔널 회원들은 원래 상당수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1809~1865)의 추종자였다. 프루동은 노동자들이 정치나 파업과는 거리를 두고 그보다 협동조합‧상호부조 설립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프루동주의 활동가들은 정치를 기피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폴레옹 3세도 이들을 용인했다. 그러나 1867년 경제위기가 닥치자 협동조합과 상호부조는 노동자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노동조합과 파업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이라는 인터내셔널의 언어를 받아들이게 됐다.

 

오래지 않아 제2제정은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인터내셔널과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1868년 3월, 경찰은 인터내셔널 파리지부를 파괴하고 회원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인터내셔널은 빠르게 재건됐고, 1870년에 이르면 파리지부 성원은 7만 명에 달해 파리 노동자 1/7을 포괄했다. 그 지도적 인물은 제본공이자 생디칼리스트였던 외젠 바를랭(Eugene Varlin, 1839~1871)이었다. 얼마 뒤 그는 파리코뮌과 국민방위대(파리코뮌을 지킨 노동계급의 무장조직)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또 다른 좌파 저항세력으로는 블랑키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19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전설적인 인물 중 하나인 루이-오귀스트 블랑키(1805~1881)를 따랐다. 프루동주의자들과 달리, 블랑키는 혁명적 정치행동을 지지했다. 그는 소수 비밀결사가 조직하는 음모에 성패가 달렸다고 믿었고, 이 무장결사체가 폭동을 일으켜 구체제를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신념에 따라 블랑키주의자들은 많아야 2,500명을 넘지 않는 정예 부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 투사들은 혁명을 준비하며 군사훈련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들이 지하활동에만 매달린 건 아니었다. 블랑키주의자들은 노동자와 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무신론과 공화주의를 선동했다. 이들 가운데 라울 리고(Raoul Rigault), 에밀 외드(Emile Eudes), 가스통 다 코스타와 샤를 다 코스타 형제(Gaston and Charles Da Costa) 같은 인물들은 모두 파리코뮌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몰락

 

1870년에 이르러 프랑스 제2제정은 경제위기와 파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저항세력은 공개적으로 거리시위를 벌이며 체제에 도전했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을 일으켜 재빠르게 승리하는 것’만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접국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이 날로 세력을 키우는 게 오랫동안 불안했던 나폴레옹 3세는 사소한 외교 분쟁을 빌미삼아 1870년 7월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한다(‘보불전쟁’ 혹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는 치명적 오판이었다. 50만에 달하는 프로이센군은 우수한 지휘체계와 현대화를 바탕으로 유럽 최강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반면, 프랑스군 장교단은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는 데 골몰하며 전쟁의 최신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전황은 빠르게 프랑스의 패배로 기울었다. 결국,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나폴레옹 3세까지 포로로 잡았다. 그러자 이틀 뒤인 1870년 9월 4일, 파리의 민중이 들고일어나 제3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기쁨의 순간은 잠시였다.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했지만, 어떤 근본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 들어선 ‘국민방위 정부’(제2제정이 붕괴하며 구성된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아돌프 티에르(후일 정부 수반으로 파리코뮌에 대한 유혈진압을 지휘한다)를 포함해 하나같이 제2제정에서 유임된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신성한 사유재산’을 위협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국민방위 정부는 프랑스로 침입해 들어온 프로이센을 막는 것보다 혁명을 저지하는 데 더 심혈을 기울였다(프로이센은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은 뒤에도 프랑스 정부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계속 진격하며 수도 파리를 포위했다).

 

파리는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국민방위 정부는 총력전을 펼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최대한 빨리 강화 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당시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가 내건 협상 조건은 가혹했는데, 거액의 전쟁배상금은 물론이고 알자스-로렌 지방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정부가 그다지 항전할 생각이 없음을 실토한 게 드러나자, 블랑키는 그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소리 높여 공격했다. 10월 31일 파리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쿠데타로 이어졌고, 블랑키는 새로운 혁명정부를 선포하며 코뮌 구성을 호소했다.

 

블랑키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쿠데타는 권력 장악에 필수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윽고 정부에 충성하는 세력이 결집해 자신들의 질서를 복구했다. 정부는 파리 민중을 달래기 위해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표하는 한편, 좌파에 대한 보복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부는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혁명가들을 체포하는 데 나섰고, 블랑키는 몸을 숨기다가 1871년 3월 17일에 가서야 붙잡히고 만다. 혁명이 발발하기 하루 전이었다.

 

 

 

포위

 

파리 외곽에 도달한 프로이센군은 도시를 봉쇄하고 식량 공급을 막았다. 이는 수도 파리 내에서 이미 첨예했던 사회적 분할을 더 심화시킬 뿐이었다. 가진 자들은 굶주리지 않았다. 물가가 치솟아도 그들은 얼마든 값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계급 거주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었다.

 

국민방위 정부는 가격 통제나 식량 배급처럼 조금이라도 상황을 개선할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조치가 “경제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71년 3월에 포위가 풀리기 전까지 무려 64,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위기 속에서 기존 질서에 맞선 혁명적 대안의 씨앗을 뿌린 새로운 대중조직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게 바로 ‘국민방위대’였다. 본래 1789년 대혁명 당시 시민 의용군으로 탄생했던 국민방위대는 이 보불전쟁 기간에 부활했다.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 국민방위대는 크게 확대되는데, 프랑스군 대다수가 포로로 잡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수만 명의 파리 노동자들이 국민방위대에 자원했다. 입대하면 급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겐 절대적 궁핍에 시달리던 가족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국민방위대는 일반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총사령관을 제외한 모든 국민방위대 장교는 민주적으로 선출됐고 즉각적인 소환도 가능했다. 이에 따라 국민방위대 소속 부대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대중의 분위기를 반영했고, 그만큼 대중의 불만을 드러내는 척도이기도 했다. 국민방위대가 노동계급 거주지역에서 새로운 부대들을 모집했기 때문에, 블랑키나 외드, 바를랭 같은 혁명가들이 지휘관으로 선출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정부는 국민방위대를 파리의 수호자가 아니라 위험한 혁명가들이라고 여겼다. 국민방위대원들도 정부가 군사적 패배에 책임이 있을뿐더러 부유한 자본가들과 왕당파가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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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센군에 봉쇄되었을 당시 절망적이던 파리를 묘사한 그림. [사진: wikipedia]

 

 

 

내전을 향해

 

1871년 1월 28일, 보불전쟁이 끝났다. 프랑스 정부는 가혹한 조건을 담은 협정에 서명했다.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할양하고, 2억 프랑의 배상금까지 물게 됐다. 이 협정은 국민의회 선거 이후 비준됐다. 1871년 2월에 치러진 이 선거에서 왕당파는 시골지방을 중심으로 압승을 거뒀고, 티에르를 새 행정수반으로 선출했다.

 

파리에서는 프로이센에 맞선 저항을 재개해야 한다는 요구가 대두했다. 도시 전체에 걸쳐 전투에 대비해 무기와 탄약을 쟁여두고 있었다. 국민방위대가 다시 조직됐고,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 선출도 이뤄졌다. 하지만 휴전협정 체결은 프랑스 정부가 프로이센에 분노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다. 티에르를 비롯한 국민의회와의 충돌은 이제 불가피했다. 파리 시내에 긴장이 고조하자 10만 명가량의 부르주아 시민이 도시에서 도망쳤다. 국민의회가 지휘하는 정규군은 12,000명에 불과했고, 더 이상 이들은 파리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관철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국민의회는 파리 민중의 분노를 야기한 2가지 도발적 결정을 내린다. 첫째는 국민의회를 수도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파리의 위신을 짓밟는 처사로 비쳤다. 곧이어 3월 13일 국민의회가 채무상환 유예 조치를 종료한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전쟁 기간에 유예됐던 채무상환 의무가 부활하면서, 노동자들과 소상공인들은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이 두 가지 조치는 정부에 맞서 파리 민중이 광범하게 뭉치는 효과를 가져왔다.

 

티에르는 국민방위대에 무장을 해제하고 즉각 굴복하라고 요구했다. 급기야 3월 18일, 그는 국민방위대가 관할하는 (파리 시내) 몽마르트 등에 설치된 400개의 대포를 탈취해오라고 정부군에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파리에 진입한 이들 정부군은 운반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몽마르트의 대포를 제거하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했고, 결국 말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정부군이 파리의 무장 해제를 강행하기 위해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파리 시민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기관총을 에워싼 채 정부군 병사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나? 대체 여기서 뭣들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아침 8시가 되자 오르나노 대로를 올라온 300여 명의 장교와 국민방위대원이 모였다. 이들은 88연대(파리에 침입한 정부군) 소속의 1개 소대 병력과 마주쳤는데, ‘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정부군을 대열에 합류시켰다. 정부군 병사들과 국민방위대원들은 자신들의 머스킷 소총 개머리판을 치켜들고 몽마르트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까지 함께 행진했다. 몽마르트 방면에 배치돼 있던 정부군 병사들은 이렇듯 동료들이 국민방위대원들과 한데 뒤섞여 어울리는 것을 보며 자신들도 국민방위대에 길을 내주려 했다. 순식간에 대규모 국민방위대 병력이 여성‧어린이들과 함께 나타났고, 이렇게 (정부군 지휘관) 르콩트 장군은 포위됐다. 그는 (밀려드는 국민방위대와 파리 시민을 향해) 세 번이나 발포 명령을 내렸지만, 정부군 병사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계속 진군하던 군중은 병사들과 금세 하나가 됐고, 르콩트와 그의 장교들은 체포됐다.”

 

 

이렇게 정부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정부군 지휘관이었던) 르콩트 장군과 토마 장군은 자신의 부하들 손에 죽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병사들은 파리를 벗어나 베르사유로 후퇴했다. 국민방위대와 노동자들은 빠르게 파리 시내 핵심 지역을 장악했다. 그 결과 1871년 3월 18일, 혁명도시 파리가 세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리 프롤레타리아들은 지배계급의 패배와 반역 속에서 결국 공무의 지휘를 자기 수중에 장악함으로써 상황을 수습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정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 자신들의 긴급한 임무이며 절대적 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로써 파리코뮌의 막이 올랐다. (다음 호에 계속)

 

 

 

* 1848년 혁명으로 왕정을 몰아내고 성립한 프랑스의 두 번째 공화정. 그러나 계급투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노동계급의 반란을 진압하며 제2공화국은 보수화의 길을 걸었고, 결국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됨으로써 짧았던 공화정이 끝나고 제2제정이 들어선다.

 

 

** ‘제1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불리는 ‘국제노동자협회’는 노동계급의 국제적‧혁명적 단결과 연대를 위해 결성한 조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요하게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 속에 1876년 제1인터내셔널은 해산하게 되지만,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기치로 한 인터내셔널 정신은 그 뒤로도 혁명운동 속에서 거듭 되살아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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