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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공동결정제: 또다시 노사협조주의 덫에 빠질 것인가

 

 

‘생산성 동맹’으로 귀결한

독일 공동결정제,

대안이 아니라 반면교사 삼아야

 

 

이주용┃기관지위원장

 

 

 

‘파업 최소화, 공동결정제 덕분’

 

산업 재편과 구조조정 위기가 닥쳐오는 지금, 경영참가론도 함께 돌아왔다. 이번에는 공동결정제가 전면에 부각됐다. 공동결정제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경영참가를 제도적 수준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독일은 이 제도를 상징하는 원조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독일에서, 특히 산업 재편의 한가운데 있는 독일 최대 기업 폭스바겐을 위시한 자동차업계에서 근 몇 년간 들려오는 소식은 수천~수만 명 수준의 인력 감축과 구조조정으로 점철돼 있다. 사측의 일방 통보인 것만도 아니다. 다름 아닌 노사 합의를 통해 고용 축소와 임금 삭감, 전환 배치 등 각종 구조조정을 관철한다.

 

이는 최근 사태에 국한되지 않는다. 1976년 공동결정법이 제정됐지만, 80년대부터 독일 실업률은 크게 상승해 2000년대 초에 이르면 공식 실업률만 10%를 넘어섰다(1970년대 후반에는 3~4% 수준이었다). 경제위기에 따른 자본가들의 공세 앞에서 공동결정제는 구조조정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노사협조를 토대로 노동자 투쟁을 가로막는 역할을 해왔다. 우파정당(독일 기독민주연합) 소속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지난 2006년에 공동결정법 제정 30주년 기념 연설에서 공동결정제를 치켜세우며 “유럽과 비교할 때 독일은 가장 적은 파업 일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공동결정제 덕분”이라고 흡족하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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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동결정제,

‘어차피 통제권은 자본가에게’

 

‘공동결정제’라는 이름은 마치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결정권을 갖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실상은 이와 다르다. 제도적 설계 자체가 자본가들이 계속 통제권을 쥘 수 있도록 보장돼 있다.

 

독일의 공동결정제는 크게 공장‧사업장 - 기업 - 초기업(국가) 수준으로 구분되는데, 이 가운데 초기업(국가) 차원의 공동결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노사정 테이블과 다르지 않다. 그 작동방식도 익숙하다. 노동조합을 끌어들여 정책에 대한 협조를 요구하고, 노조가 반발해도 입법으로 강행 처리한다. 독일판 노동개악의 상징인 2002년 ‘하르츠 개혁’이 이런 경우다. 당시 사회민주당-녹색당 연립정부(총리는 사민당 소속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비정규직 단기 일자리 확대와 쉬운 해고, 실업수당 삭감 등을 포괄하는 대대적 노동개악을 추진했는데, 노사정 협상 과정에서 노동조합 측이 반대하자 노‧사‧정‧학계 인사로 구성된 별도 위원회를 꾸려 개악안을 완성하고 의회에서 통과시켜버렸다.

 

기업 차원의 공동결정제를 보면, 노사가 형식적으로도 결코 ‘같은 권한’을 가진 게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표들은 기업의 감독위원회에 참여하게 되는데, 감독위원회는 실제 기업경영을 담당하는 이사회를 선출하는 한편 자문에 응하고 경영상황을 보고받는 감독기구다. 그런데 고용 규모 2,000인 이하 기업에서는 감독위원회 정원의 1/3만 노동자 대표에게 배정한다. 즉, 애당초 ‘노사 동수 구성’이 아니다. 2,000인 초과 대기업은 노사 동수로 감독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지만, 여기에도 꼼수가 있다. 안건을 의결할 때 양측이 50:50으로 팽팽하게 갈려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경우, 감독위원회 의장이 2표를 행사할 수 있게 보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감독위원회 의장은 사측 위원들끼리 호선으로 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결국,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사측이 언제나 과반을 점해 의사를 관철하도록 장치를 마련해놓은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 대표 가운데 ‘간부급 사원’ 대표를 최소 1명 이상 포함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사실상 사측 관리자나 다름없는 인원을 ‘노동자 대표’에 끼워 넣음으로써 이중 잠금장치를 건 셈이다.1

 

공장‧사업장(하나의 기업이 여러 개의 공장이나 사업장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과 구분되는 범주) 수준의 공동결정제를 살펴보면, 말이 좋아 ‘공동결정’이지 노동자들의 생존이 걸린 핵심 문제는 ‘합의’가 아니라 ‘협의’로 처리하게 되어 있다. 독일에서 5인 이상이 고용된 사업장은 해당 사업장 종업원 전체를 포괄하는 ‘평의회’를 설치하고 고용 규모에 비례해 종업원 대표(평의원)를 선출해야 하는데, 이 사업장별 평의회가 주기적으로 사측과 만나 ‘공동결정’을 수행한다. 그런데 이들이 ‘합의권’, 즉 실제 공동결정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복리후생과 임금‧성과급 영역, 그리고 평의원에 대한 해고(특수해고) 문제에 국한된다. 정작 일반해고에 관해서는 ‘경청권’만 갖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공동결정’이라고 칭하기 어려우며, 인사계획과 인력 수요 등 인사권에 속하는 대부분의 영역은 ‘통보’ 혹은 ‘협의’ 대상일 따름이다. 무엇보다 공장이나 사업장의 이전‧합병, 기술 도입과 생산‧노동방식의 변경, 투자계획 등 구조조정과 직결된 경영권 영역 역시 모두 ‘통보’나 ‘협의’만 하면 그만이다.

 

그간 한국 민주노조운동이 투쟁으로 단체협약을 쟁취하면서 경영권‧인사권에 관한 폭넓은 ‘합의’ 조항을 만들어냈던 것에 비춰보면, 공동결정제는 오히려 그 이름이 무색하다. 당면한 구조조정과 산업 재편에서 공동결정제는 지금의 단체협약만큼의 보호조차 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공동결정제를 통한 소유권과 경영권 통제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노사 공동’이라는 제도 형태가 아니라 의사를 관철할 ‘힘’이며, 그 ‘의사’의 계급적 내용이다.”2

 

 

 

‘생산성 동맹’으로의 귀결과

계속되는 후퇴

 

이렇듯 제도 자체부터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지만, 무엇보다 독일 공동결정제의 문제는 산업에 대한 노동계급의 통제를 촉진하긴커녕 거꾸로 노동자들을 자본의 생산성 논리에 결박시킴으로써 지속적으로 계급성을 희석하고, 노사협조 노선에 근거한 양보와 후퇴를 거듭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앞서 언급한바 공동결정의 조직적 기초를 구성하는 공장‧사업장 평의회는 ‘절대적 평화 의무’에 따라 파업이 금지되며, 회사 내에서 정당활동도 할 수 없다.3 뿐만 아니라 공동결정 과정에서 경영 관련 주요 정보를 획득한다고 해도, 사측이 ‘비밀’로 지정한 내용에 대해서는 법률에 의해 비밀 유지 의무를 져야 한다. 자주성‧투쟁성을 포기하고 철저히 경영진의 일부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렇듯 쥐꼬리만 한 ‘경영참여’라도 자본은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보다 훨씬 큰 것을 노동자들에게 ‘대가’로 요구했다.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은 극히 제한돼 있고, 평의회의 쟁의는 원천 봉쇄된 데다 노동조합의 파업권 역시 산별노조 지도부가 관료적으로 통제하는 환경에서, 노동자들은 노사협조 곧 ‘산업평화’와 ‘생산성 제고’의 대가로 임금 상승을 얻어내는 체제에 순응하게 됐다. 이른바 ‘생산성 동맹’의 형성이었다.

 

이런 귀결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76년 공동결정법 제정에 앞서 1951년 선제적으로 공동결정제를 도입한 철광산업이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1970년, 독일 정부는 이 제도가 철광산업 노사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조사한 보고서를 발간한다. 그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사회[인용자: 앞서 이 글에서 언급한 ‘감독위원회’를 가리킴. 이하에서는 ‘감독위원회’로 수정해 인용]가 노사 동수로 구성되는 까닭에 양측의 의견이 서로 충돌하여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가 잦을 것으로 예측할 수도 있으나, 실제의 경험은 이와 다르다. 특수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감독위원회에서의 충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들[인용자: 노동자 대표]은 기업 생산성의 향상이 높은 임금수준과 안정된 직장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사회의 기업 정책적 구상이 감독위원회를 통한 공동결정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4 이런 결론이 나옴에 따라, 독일 정부는 곧이어 1976년에 공동결정법을 제정함으로써 공동결정제를 철광산업 외에도 제반 산업의 대기업에까지 확산시킨다. 물론 자본가들의 요구를 반영, 위에서 지적했듯 엄밀한 ‘노사 동수’가 아니라 사측 의장이 2표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꼼수’를 끼워 넣어서 말이다.

 

하지만 ‘호시절’은 곧 지나갔다. 자본주의 호황이 펼쳐진 1950~60년대에는 이렇게 ‘생산성’과 ‘임금상승’을 주고받는 구도가 물질적으로 가능했겠지만, 70년대 경제위기가 본격화하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몰려왔다. 특히 철광산업은 시장경쟁력을 잃고 몰락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는데, 이 산업이 밀집해 있던 독일 루르 지역은 1980년대에 이르러 실업률이 15~17%까지 앙등하며 30년대 세계대공황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폐업과 인원 감축이 잇따랐다.5 다른 산업이라고 사정이 나을 건 없었다. 가령, 이 시기 이후 양보교섭을 반복한 자동차산업은 2000년대 초 폭스바겐의 “아우토5000” 프로젝트에서 드러나듯 △정규직 대비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노동강도 강화 등을 기본으로 한 ‘중규직 만들기’를 노사 합의로 추진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광주형 일자리’의 모델로 삼고 있는 게 바로 이것이다.

 

 

애초 독일 공동결정제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분출을 억누르고 무마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었다. ‘평의회’는 본래 1918~19년 독일혁명에서 탄생했던 노동자들의 계급투쟁 기관으로, 러시아혁명에서의 ‘소비에트’와 비슷한 성격을 내포했다(‘소비에트’ 역시 ‘평의회’라는 뜻의 낱말이었다). 평의회로 뭉친 노동자들은 산업을 장악하고 새로운 체제의 맹아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런 계급투쟁을 유혈 진압한 게 지배계급과 연합한 독일 사회민주당 세력이었다. 혁명의 잔불까지 모두 짓밟은 뒤 이들은 평의회의 계급투쟁적 성격을 제거하고 그 대신 노사협조체제의 형식적 기구로 전환시켰다. 1951년 철광산업에서 먼저 공동결정제가 도입된 것도 당시 철광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대규모로 벌어지자 산업 국유화 요구를 포기시키는 대가로 손에 쥐여준 것이었다.

 

계급투쟁에 직면한 자본가들이 부분적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내놓은 공동결정제는 노동계급을 자본에 순치시키면서 결정적으로 경제위기나 구조조정이 닥쳤을 때 도리어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강제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산업구조조정 앞에서 노동계급의 후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했던 독일 공동결정제가 작금의 ‘구조조정 대응책’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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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독일혁명에서 탄생한 '평의회'는 새로운 체제로 이행할 맹아를 품고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평의회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민당 정권은 이를 군사력으로 짓밟고, 평의회의 계급투쟁적 성격을 제거했다. 사진은 1918년 혁명 와중에 독일 브레멘에서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했던 모습. [사진: wikipedia]

 

 

 

 

 

* 이 문단과 바로 아래 문단에서 기업 및 공장‧사업장 차원의 독일 공동결정제 구조를 설명한 내용은 권기홍, 「독일의 노동자 참가제도」. 조우현 엮음, 『세계의 노동자 경영참가』, 창작과비평사, 1995 참조. 덧붙이자면, 이 책은 공동결정제를 비롯한 노동자 경영참가를 긍정하며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취지로 서술돼 있다.

 

 

** 백종성, “재벌사회화, 생산과 이윤에 대한 통제로”, <변혁정치> 40호(2017년 3월 1일 자) 기사.

 

 

*** 『독일 금속노조의 이해』, 영남노동운동연구소, 1994, p.59.

 

 

**** 권기홍, 앞의 글, pp.154~155.

 

 

***** 헬가 그레빙(이진일 옮김), 『독일 노동운동사』, 도서출판 길, 2020, pp.27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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